'헌옷? 아닙니다. 빈티지 패션? 맞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바빠졌다. 두툼한 겨울옷 하나 사려면 최소 10만원 이상은 줘야 한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서민들로서는 다가오는 겨울이 두렵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바로 '구제' 시장. 대구에만 해도 구제 의류를 다루는 매장이 줄잡아 족히 300여곳은 넘는다.
◆ 구제 패션 1번지, 대구 옛 자유극장 골목
'대구 구제패션의 1번지'라 불리는 대구 옛 자유극장 골목. 그곳에는 줄잡아 수십여개의 구제 가게들이 몰려있다.
옛 자유극장 건물 자리의 한 구제옷 매장. 박스째로 풀어놓은 물량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남자 성인이 입을 수 있는 가죽 재킷, 아기 옷, 목도리, 스웨터, 속옷, 담요 할 것 없이 온갖 종류의 옷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신제품도 섞여 있다. 국적도 다양하다. 국산은 물론 이탈리아, 일본 옷들이 많다.
마침 할머니 두분이 옷더미 사이에서 가족들의 머플러를 고르고 있다. "이건 네 며느리한테 어울릴 것 같은데?" "영감한테 주면 좋아하겠네."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옷과 소품을 고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매일같이 나오는 '구제 마니아들'이라고 한다.
백화점에선 족히 100만원은 줘야할 법한 가죽 재킷도 이곳에선 몇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다. 이탈리아산 롱 가죽 부츠도 10만원 이내에 구입할 수 있다. 잘 뒤져보면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제품도 많다.
구제 시장도 두 부류로 나뉜다. 국산 구제와 명품 구제. 국산 구제 마니아들은 주로 학생들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브랜드 의류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명품 구제는 주로 일본과 유럽 등지의 제품들인데, 한짝(100kg) 단위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 속에서 질 좋고 새것 같은 제품을 고르는 것은 '보물찾기'.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5천~1만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질 좋은 명품을 건질 수 있다.
상인들의 단골 관리도 이 차원에서 이뤄진다. 상인들은 단골들 취향에 따라 '특A급' 물건들을 따로 빼놓는다. 남이 입었지만 '명품'이란 브랜드가 붙으면 다르게 취급받는다. 이 재미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사람들도 종종 구제 명품시장을 기웃거린다.
구제골목의 김은진 사장도 손님으로 왔다가 아예 구제 장사로 뛰어든 경우다.
"명품 여름 티셔츠 10장을 1만원에 사갔는데, 너무 잘 입었어요. 그 후에 구제 마니아가 돼 왜관에서 여기까지 매일같이 놀러 나왔죠. 10년 전엔 아예 제가 이 업종으로 뛰어들었어요."
교동 귀금속거리에서 동아백화점 본점에 이르는 길에는 최근 1, 2년 사이 문을 연 구제 가게들이 많다. 1년 전 문을 열었다는 한 가게 사장은 "구제는 바깥 매장보다는 경기를 덜 타는 것 같다"면서 "이 장사는 자기 할 나름"이라고 귀띔한다. '구제 옷들은 구질구질하다'는 편견 때문에 요즘엔 신제품 의류도 매장에 갖추고 분위기를 깔끔하게 다듬는 가게도 늘고 있다.
◆ 구제 의류가 되기까지
대구는 전통적으로 구제 시장이 유명하다. 서울은 광장시장, 부산은 국제시장, 대구는 교동시장이 구제 명물 시장으로 통하는데, 구제 물품을 취급하는 소위 '큰손' 가운데 대구 출신이 많아 대구에 '특히 괜찮은' 상품들이 내려온다. 큰손들은 100kg들이를 100상자 이상 전국에 뿌린다. 또 서울보다 훨씬 싼 가격도 유명세에 한몫했다. 구제를 취급하는 한 가게 사장은 "한때 구제 청바지의 대구 시장 가격이 서울의 절반밖에 안 돼, 서울 사람들이 대거 대구의 구제 매장을 찾기도 했다"고 전한다. 요즘도 지방 소도시에서 매주 물건을 하러 대구를 찾는 상인들이 많다.
특히 일본은 생산된 신제품이 1년 이상 되면 아울렛으로, 2년이 지나면 소각장으로 향한다. 그때 리사이클 업체가 이를 구매해 구제로 판매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번도 입지 않은 새 옷이 가격표가 붙은 채로 들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격표에 100만원이 넘게 찍힌 코트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대구의 경우 교동 시장 인근에 150여곳이 있고 서문시장 근처 관문시장 부근에도 150여곳이 넘는 구제 시장이 형성돼 있다. 그 외에도 봉덕시장, 서문시장 등 재래시장에는 어김없이 구제 매장이 형성돼 있다. 최근 소규모 동네 시장에도 구제 매장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안상호 편집위원 shah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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