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22)영남대 설립에 얽힌 이야기

영남대학교는 6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영남을 대표하는 사립대이다. 1967년 12월 22일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병해 학교법인 영남학원을 설립하였고, 교명을 영남대학교로 변경하였다. 또한 지성의 전당으로서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 교육과 생산 교육을 추진함으로써 민족중흥의 새 역사 창조에 기여함을 창학정신으로 삼고 있다.

대구대학은 경주 최 부자로 널리 알려진 최준(崔浚'1884~1970)이 1947년 3월 설립하였다. 또한 청구대학은 항일정신의 거두였던 최현달(崔鉉達)의 아들인 최해청(崔海淸'1905~1977)이 1948년 9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근로청소년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대학이었다.

대구대학을 설립한 최준은 최 부잣집의 후예이다. 그는 300여 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던 만석꾼의 전 재산을 1947년 대구대학 설립을 위해 기부하고 무대 뒤로 물러났다. 흔히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고 하지만 경주 최 부자가 오랜 세월 부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독특한 가훈(家訓)에 있다. 첫째는 양반 가문에서 스스로의 처신과 대인 관계를 위한 교훈적 말씀인 '자연의 순리대로 행하라'는 6연(六然), 둘째는 선대가 후대에게 귀감이 될 구체적인 교훈으로 가거십훈(家居十訓), 셋째는 이 가문만의 독특한 가훈이라 할 수 있다.

그 가훈을 살펴보면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며느리들은 시집 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찬찬히 훑어보면 욕심을 내지 말고,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라는 큰 뜻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최준은 신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대학을 설립하는 데 전 재산을 내놓는 결단을 하게 된 것이다.

청구대학을 설립한 최해청은 구한말 청도군수를 지낸 최현달의 아들이다. 그런 최해청이 청구대학을 설립하게 된 배경은 해방 이후 시국을 걱정하는 모임인 삭망회(朔望會)를 조직할 당시 대구시보사(大邱時報社) 장인환 사장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1947년 3월, 최해청은 대구시보사의 독립운동국장으로 취임했다. 그 조직은 '해방 기운은 점점 식어들고 일제 잔재가 고개를 든다'고 탄식하며 독립운동의 생활화를 기치로 만든 기구였다.

그는 열성적인 학생들과 지역 유지가 참여하는 기성회를 발족시켜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청구대학의 모태가 된 대구문리과 전문학원 야간부를 개교하였다. 그 뒤 1950년 4월 25일, 재단법인 청구대학을 인가받아 야간대학으로 개교하였고, 자신은 청구대학의 이사 겸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뒤 1955년 문화동(지금의 노보텔 자리)으로 학교를 이전하며 전성기를 누렸는데, 그 당시 야간대학이던 청구대학은 사정상 고등학문을 배우지 못한 늦깎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러다가 큰 난관에 봉착했다. 재단의 경리직원들이 비리를 저질러 재정난을 가중시켰을 뿐 아니라, '교사 붕괴사고'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1967년 6월 15일, 교사 신축공사 현장에서 이른바 'Y자형' 건축물이 내려앉는 대형 사고였으며, 그 같은 사고는 설립자인 최해청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침내 이동녕'김성곤 같은 이들이 새로운 이사로 추가된 경영진은 수습책으로 학교를 내놓았다.

이때 중개자 역할을 한 사람이 이은상(李殷相'1903~1982)이었다. 이은상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을 100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두고 나면 빗자루를 들고 돌아설 생각을 해 보았는가? 그렇다고 회사 사장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외국에서는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대학 총장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가장 떳떳한 것 같고…."하면서 장시간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대구대학도 재정난으로 삼성그룹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사건 수습책으로 학교의 관리를 군사정부에 위임하였고, 이사로 있던 성상경'최준'이효상 등이 청구대학과의 합병을 결정했다. 그 일의 실무 역할은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이후락이 맡았다. 그리하여 두 학교를 합병하여 영남대를 설립하였고, 학교의 운영에 관한 대리권을 이후락에게 맡겼다. 그 뒤 1980년 신군부는 박근혜에게 재단 일을 맡겼고, 8년간 이사장과 이사로서 학교를 맡아 운영하였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