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감동은 욕망아닌 배려에서 나와

한 사내와 여인이 인적이 뜸한 공원의 벤치에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곁에는 초라하고 낡은 가방이 두서너 개 놓여 있었다. "벌써 방세가 넉 달째나 밀렸어. 한 번만 봐달라고 말한 게 몇 번째야? 이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당장 방을 비워줘요!" 그들에게 차갑게 던진 냉정한 집주인의 말이 귀를 울렸다.

그때였다. "어머, 월트! 저 쥐 좀 봐요." 느닷없이 들뜬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사내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띤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무엇이 아내를 기쁘게 한 걸까? 결혼한 후로는 가난에 찌들어 한 번도 저런 웃음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사내는 몹시 의아해하며 여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작은 쥐 한 마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좀 자세히 봐요. 얼마나 귀엽게 움직이는지 절로 웃음이 나온다니까요."

과연 그녀의 말대로 생쥐는 온갖 재롱을 부렸다. 사내는 생쥐와 여인의 모습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 순간 그 두 모습 속에서 그는 새로운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맞아! 저 귀여운 쥐를 소재로 만화를 그려보자. 저런 귀여운 모습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많은 이들의 괴로움을 덮어줄 수 있을 거야!'

그는 낡은 공책을 꺼내 재빨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귀가 크고 빨간 넥타이를 맨 생쥐의 모습이 공책 위에 나타났다. 이것이 그 유명한 미키마우스의 등장이다. 그 사내는 월트 디즈니였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월트가 귀여운 쥐를 소재로 만화를 그려 돈을 벌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아픈 사람들을 자신의 만화로 위로하려고 했기에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요즘 아이들은 자주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대체로 무의미한 괴성이거나 울림 없는 메아리다. 감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동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그러면 누구에게 감동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감동해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에게 감동하면 자신은 분명 소중한 존재다.

나아가 감동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오지 않는다. 배려에서 나온다. 내 욕망만 채워 나가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정말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지?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게 능사일까? 모두가 이기면 과연 지는 사람은 없어질까? 과연 모두 이기는 법은 있을까? 지금과 같은 시대, 지금과 같은 교육 현실에서는 당연히 없다. 정말 모두가 이기는 방법은 없을까?

요즘 프랑스 교육을 공부하고 있다. 솔직히 부러운 점이 많다. 어떤 제도에도 빛과 그늘은 존재할 게다. 살다 보면 반칙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반칙이 옳다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살다 보면 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죄를 지어야 잘살 수 있다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반칙을 하고 죄를 짓더라도 성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목적이고,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면? 최소한 교육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1㎏의 금을 가진 자는 10㎏의 금을 원한다. 10㎏의 금을 가질 때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문제는 10㎏의 금을 가지게 되면 다시 100㎏의 금을 원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이렇게 욕망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배려하고 나누는 그것이 가능할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바른길이라고 믿고 실천한다면 가능하다.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교육이다. 이제 아이들에게 무한한 욕망의 추구만이 행복이 아니라 배려가 진정 행복한 길임을, 더불어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 유일한 길이 바로 서로 감동하는 것, 바로 공감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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