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최고위원회로부터 '기초자치선거정당공천제찬반검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전화를 받은 것은 5월 중순이었다. 의아했다. 왜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그 뜻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당 내외 이해관계가 착종(錯綜)되어 있으니 그것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교수'가 정리를 한번 해 보라는 취지였던 것 같다.
한 달가량, 그간에 진행된 논의도 찾아보고 이곳저곳에 넌지시 의견을 물어보기도 하다가 6월 중순부터 위원회를 구성하고 검토를 시작했다.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에 대한 입장은 크게 갈렸다. 중앙정치인과 지방정치인의 생각이 다르고, 지역에 따라 다르고, 부문에 따라 달랐다. 지방정치인이라도 원내와 원외가 다르고, 중앙정치인도 자신의 지역구에서 지도력이 있느냐에 따라 달랐다.
기초자치선거에 정당공천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쪽이나 폐지하는 것이 좋다는 쪽, 어느 주장이 더 그럴듯한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웠다. 정당공천 유지론과 폐지론의 장단점 논란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쟁점들은 모두 정치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이기도 했다. 지고지순의 정치제도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제도는 이런 좋은 점이 있으면 저런 염려거리가 있게 마련이 아닌가? 그래서 논의는 교착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뭔가 논의를 진전시킬 계기가 필요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보았다. '대안'이 뭐냐는 것이다.
'문제 상황'에 대한 정의는 분명했다. 정당공천 유지론이나 폐지론의 입장이 다르지 않았다. 풀뿌리 자치,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있다.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되어 지방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 지방정치인들은 중앙정치에 줄을 서기 바쁘고 그런 관계에서 온갖 비리와 부정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궁금증은 유지론과 폐지론이 이런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 유지론의 가장 중요한 대안은 '정당공천 및 정당운영의 민주화'였다. 그것을 통해서 풀뿌리 자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정당공천제 유지론이 여론의 지지를 얻기 어렵겠다'라는 판단을 했다. 왜냐하면, 정당공천 민주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국민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각 정당들은 정당공천을 민주화하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지켜본 적이 없다. 따라서 정당공천 민주화를 통해서 풀뿌리 자치 정신을 실현하겠다고 말하면 국민들로부터 조롱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정당공천제 폐지가 불가피하지 않은가라는 쪽으로 다수의 의견이 모였다. 하지만 폐지론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여성의 진출을 위한 적극적 조치가 없어진다는 점이었다.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는 지방정치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동안 여성들이 정당공천 비례대표제를 통해 기초의회에 진출하던 통로가 없어진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정당공천을 폐지하면서 '여성명부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여성명부제'는 여성후보들만으로 명부를 만들고 유권자들이 지역구에 한 표, 여성명부에 한 표를 던져서 당선자를 결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와 함께 민주당 기초자치선거정당공천제찬반검토위원회에서는 정당공천 폐지의 위헌 시비를 막기 위해 정당표방제가 필요하고, 기초자치선거가 정당이 개입하는 광역시도지사, 시도의회 선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당별로 일괄 기호를 부여하는 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선거용 인쇄물에 표기하는 순서는 추첨을 통해서 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7월 4일, 민주당이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의견을 발표하였고, 같은 날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 박재창 교수도 정당공천제 폐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기자간담회에서 발표했다. 약간의 내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 폐지에 기본적으로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민주당이 이달 중으로 전체 당원투표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폐지론'은 급물살을 탈 것이다. 풀뿌리 자치의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고 있다.
김태일/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
댓글 많은 뉴스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 확정…TK 출신 6번째 대통령 되나
김재섭, 전장연 방지법 발의…"민주당도 동의해야"
이재명 "함께 사는 세상 만들 것"…이승만·박정희 등 묘역참배
文 "이재명, 큰 박수로 축하…김경수엔 위로 보낸다"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