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세에 은퇴를 했다. 소방공무원으로 30년. 하루도 긴장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그에게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견디기 힘들었다. 힘이 빠졌다. 괜히 기가 죽었다.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문득 오랫동안 듣기만 했던 클래식 노래를 직접 불러보고 싶었다. 가곡교실을 수소문했다. 노래를 배우고 온 첫날 아내는 말했다. 눈빛이 달라졌다고. 그날로 그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이형균(61'대구시 달서구 신당동) 씨. 그는 자칭 로맨티스트다.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에 눈시울 적시고 맛깔난 문장에 잠을 설친다. 멋진 의상을 갖춰 입고 세레나데를 부를 땐 영락없는 낭만파 테너가수였다. 내친김에 그의 삶의 노래까지 들었다.
-좋은 목소리는 아닌 듯하다.
"탁음이다. 목소리가 좋지 않아 고민을 많이 했다. 훈련으로 좋아질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좋은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모든 사람들이 노래를 즐길 수 있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낀다고나 할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노래를 배우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가사를 외워야 하고 연습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은퇴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없다. 부부가 함께하면 더 좋다."
-가사 외우기 힘들지 않나.
"솔직히 말하면 가사 외우기가 가장 어렵다. 그래서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다. 외워야 할 할 가사를 다섯 장 복사해서 침대, 차 안, 식탁, 컴퓨터, 화장실에 붙여놓는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있는 가사를 외울 때도 있다. 아내는 잠자리에서조차 노래를 생각한다고 불만이다. 그만큼 노래가 좋다. 오페라 아리아 한 곡을 외우려면 보통 2주 정도 걸린다."
-공무원이었는데 54세에 은퇴한 이유가 있나.
"일찍 승진해 43세에 소방서장을 했다. 서장 11년을 하면 물러나게 돼 있다. 그래서 퇴직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많이 힘들었다. 지역과 지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는데 그 자부심이 없어지자 후줄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탈출구가 노래였다."
-일과 중에 직원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었다고 했다.
"소방관들은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린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과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의 자책감은 엄청나다. 또 사고현장에서 받는 충격과 마음의 상처는 깊고 크다. 그런 직원들에게 치유와 위로의 시간을 주기 위해 클래식 음악을 틈틈이 들려줬다. 또 아름다운 영화도 보여줬다. 나중에는 직원들에게 업무시간에 영화와 음악을 틀어준다고 해서 주의까지 받았다. 우리나라 소방관들은 외국처럼 힐링프로그램 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다."
-집에 음악실을 꾸몄다. 부럽다.
"2006년 은퇴한 그해에 옥탑방에 작은 음악실을 만들었다. 오래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소방관이란 직업이 주는 긴장감이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음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틈틈이 LP판과 CD를 사 모았다. 그러다 보니 CD가 1천 장이 넘는다. 지금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도 하고 감상도 하고 있다."
-스스로 로맨티스트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감성 과잉인 사람이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눈이 빨갛게 돼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아내의 지청구가 이어지지만 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로맨티스트라고 부르며 위안을 삼는다."
-소방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이래 봬도 꽤 유능한 소방관이었다.(웃음) 잘 운다고 약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다. 직업이라는 것이 무섭다. 지금도 결혼한 두 딸과 아들집에 가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화재에 대한 안전점검이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이수인 곡 '내 마음의 강물'이다. 이 노래는 은퇴자를 위한 노래 같다. 특히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라는 마지막 부분을 부르면 아직도 남자로서 할 일이 있고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생긴다. 유장미가 있어 좋다."
-늘 죽음과 마주 서 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좀 심하게 말하면 한 달, 아니 내일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를 소중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조금 전에 움직이던 사람이 몇 초 만에 주검이 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하느님도 원망해 봤고 삶이 허무해 울기도 많이 울었다. 결론은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의 의미를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작가 이윤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작가 이윤기의 팬이다. 나와 정서도 비슷하고 맛깔스러운 글이 정말 좋아 언젠가는 꼭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그의 부음이 신문에 실렸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진작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때 이후로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미루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바로 한다. 유보할 행복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앞으로의 꿈은?
"개인 독창회를 여는 것이다. 그것도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싶다. 지난해 환갑에 무대를 마련하려 했으나 아내의 말을 듣고 접었다. 내 노래가 아직 덜 익었다는 아내의 냉정한 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안에 꿈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노래를 잘하는 비결이라면.
"뻔뻔스러움이다. 3층 옥탑방에서 노래 연습을 한다. 아무리 방음을 한다지만 소리가 퍼져 나가기 때문에 이웃의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연습을 한다.(웃음) 뻔뻔스러워야 노래도 잘 부를 수 있다."
-다른 취미는 없나.
"파크골프다. 올봄에 시작했다. 음악을 듣는 정적인 취미만 하다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아내와 함께 파크골프장에 나간다. 아내(이점희'60)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노래 외에 하나 더 생겨 즐겁다. 은퇴 후 삶,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하하."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강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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