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2부> 행복한 은퇴자들 (24)낭만파 카수 이형균 씨

화마와 싸우던 소방관 "나의 비상구는 클래식"

퇴직하고 막연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노래는 이형균 씨에게 새로운 생활을 가져다주었다. 노래하는 그날로 눈빛이 다시 살아난 것은 물론이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바쁘게 됐다고 했다.
퇴직하고 막연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노래는 이형균 씨에게 새로운 생활을 가져다주었다. 노래하는 그날로 눈빛이 다시 살아난 것은 물론이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바쁘게 됐다고 했다.
그의 음악실에는 사방을 가득 메운 음반들로 가득했다. 그는 매일 이방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행복감에 빠진다고 말했다.
그의 음악실에는 사방을 가득 메운 음반들로 가득했다. 그는 매일 이방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행복감에 빠진다고 말했다.
올봄부터 부부는 파크골프를 시작했다. 돈도 시간도 많이 들지 않아 은퇴자들에게 권하고 싶다고 했다.
올봄부터 부부는 파크골프를 시작했다. 돈도 시간도 많이 들지 않아 은퇴자들에게 권하고 싶다고 했다.

54세에 은퇴를 했다. 소방공무원으로 30년. 하루도 긴장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그에게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견디기 힘들었다. 힘이 빠졌다. 괜히 기가 죽었다.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문득 오랫동안 듣기만 했던 클래식 노래를 직접 불러보고 싶었다. 가곡교실을 수소문했다. 노래를 배우고 온 첫날 아내는 말했다. 눈빛이 달라졌다고. 그날로 그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이형균(61'대구시 달서구 신당동) 씨. 그는 자칭 로맨티스트다.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에 눈시울 적시고 맛깔난 문장에 잠을 설친다. 멋진 의상을 갖춰 입고 세레나데를 부를 땐 영락없는 낭만파 테너가수였다. 내친김에 그의 삶의 노래까지 들었다.

-좋은 목소리는 아닌 듯하다.

"탁음이다. 목소리가 좋지 않아 고민을 많이 했다. 훈련으로 좋아질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좋은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모든 사람들이 노래를 즐길 수 있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낀다고나 할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노래를 배우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가사를 외워야 하고 연습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은퇴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없다. 부부가 함께하면 더 좋다."

-가사 외우기 힘들지 않나.

"솔직히 말하면 가사 외우기가 가장 어렵다. 그래서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다. 외워야 할 할 가사를 다섯 장 복사해서 침대, 차 안, 식탁, 컴퓨터, 화장실에 붙여놓는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머리맡에 있는 가사를 외울 때도 있다. 아내는 잠자리에서조차 노래를 생각한다고 불만이다. 그만큼 노래가 좋다. 오페라 아리아 한 곡을 외우려면 보통 2주 정도 걸린다."

-공무원이었는데 54세에 은퇴한 이유가 있나.

"일찍 승진해 43세에 소방서장을 했다. 서장 11년을 하면 물러나게 돼 있다. 그래서 퇴직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많이 힘들었다. 지역과 지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는데 그 자부심이 없어지자 후줄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탈출구가 노래였다."

-일과 중에 직원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었다고 했다.

"소방관들은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린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과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의 자책감은 엄청나다. 또 사고현장에서 받는 충격과 마음의 상처는 깊고 크다. 그런 직원들에게 치유와 위로의 시간을 주기 위해 클래식 음악을 틈틈이 들려줬다. 또 아름다운 영화도 보여줬다. 나중에는 직원들에게 업무시간에 영화와 음악을 틀어준다고 해서 주의까지 받았다. 우리나라 소방관들은 외국처럼 힐링프로그램 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다."

-집에 음악실을 꾸몄다. 부럽다.

"2006년 은퇴한 그해에 옥탑방에 작은 음악실을 만들었다. 오래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소방관이란 직업이 주는 긴장감이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음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틈틈이 LP판과 CD를 사 모았다. 그러다 보니 CD가 1천 장이 넘는다. 지금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도 하고 감상도 하고 있다."

-스스로 로맨티스트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감성 과잉인 사람이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눈이 빨갛게 돼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아내의 지청구가 이어지지만 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로맨티스트라고 부르며 위안을 삼는다."

-소방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이래 봬도 꽤 유능한 소방관이었다.(웃음) 잘 운다고 약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다. 직업이라는 것이 무섭다. 지금도 결혼한 두 딸과 아들집에 가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화재에 대한 안전점검이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이수인 곡 '내 마음의 강물'이다. 이 노래는 은퇴자를 위한 노래 같다. 특히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라는 마지막 부분을 부르면 아직도 남자로서 할 일이 있고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생긴다. 유장미가 있어 좋다."

-늘 죽음과 마주 서 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좀 심하게 말하면 한 달, 아니 내일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를 소중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조금 전에 움직이던 사람이 몇 초 만에 주검이 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다. 하느님도 원망해 봤고 삶이 허무해 울기도 많이 울었다. 결론은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의 의미를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작가 이윤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작가 이윤기의 팬이다. 나와 정서도 비슷하고 맛깔스러운 글이 정말 좋아 언젠가는 꼭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그의 부음이 신문에 실렸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진작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때 이후로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미루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바로 한다. 유보할 행복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앞으로의 꿈은?

"개인 독창회를 여는 것이다. 그것도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싶다. 지난해 환갑에 무대를 마련하려 했으나 아내의 말을 듣고 접었다. 내 노래가 아직 덜 익었다는 아내의 냉정한 평이 있었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안에 꿈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노래를 잘하는 비결이라면.

"뻔뻔스러움이다. 3층 옥탑방에서 노래 연습을 한다. 아무리 방음을 한다지만 소리가 퍼져 나가기 때문에 이웃의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연습을 한다.(웃음) 뻔뻔스러워야 노래도 잘 부를 수 있다."

-다른 취미는 없나.

"파크골프다. 올봄에 시작했다. 음악을 듣는 정적인 취미만 하다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아내와 함께 파크골프장에 나간다. 아내(이점희'60)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노래 외에 하나 더 생겨 즐겁다. 은퇴 후 삶,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하하."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강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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