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히포크라테스의 수난

요즘 방송에서 가공식품 광고를 통해 우리 귀에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는 얘기를 '2천500년 전 히포크라테스'가 했단다. 정말 그가 그렇게 말했는가의 진위 여부는 뒷부분에서 밝히기로 하고, 일단 그 말에 초점을 두자.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섭취가 건강에 중요하다는 말은 나도 여러 번 했거니와 백번 옳다.

그러나 아무리 강조하기 위함이라 해도 음식으로 안 되면 약으로도 못 고친다면 세상의 모든 약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여기서 그 말의 배경이라는 기원전으로 잠시 가 보자.

당시의 약으로 겨우 고칠 수 있는 병이 몇 개나 됐을까? 사실은 옳은 약도 없었고 마취도 없었다. 그러니 수술도 못했고 행여 억지로 수술을 해도 항생제가 없어 잘 곪았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원전에는 '나는 칼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라는 부분이 있다. 이는 외과적 처치를 하지 않겠다는 말인데 당시의 수술은 세균감염과 통증으로 결과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마취와 소독의 등장으로 그나마 옳은 외과수술이 시작된 것은 불과 200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히포크라테스가 살았던 시기에는 맹장염(충수염)은 사망선고와도 같아서 할 수 있는 수술은 없었고, 그나마 도움이 되는 약(항생제)마저 없었다.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이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안 되니 그의 시대로부터는 2천400년이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맹장염에 걸렸는데 수술과 약을 물리친 채 음식만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 알렉산더나 칭기즈칸이 아무리 대단한 정복자였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그들처럼 창과 칼을 갖고 전쟁터로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히포크라테스가 타임머신을 타고 이 시대로 온다면 우리는 재밌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현대의 의학에 놀란 나머지 그가 약과 수술의 맹신자가 될 가능성이 크고, 오히려 우리가 과신은 금물이라고 그를 말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히포크라테스가 약이나 수술 대신에 음식을 통한 섭생과 자연 치유를 중요시한 것은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에서 '음식과 자연치유'가 재조명돼야 할 필요가 있다. 음식으로 고치고 조절할 수 있다면 굳이 약을 쓸 필요가 없고, 자연히 치료될 수 있는 것을 억지로 수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반전이 있다. 사실은 히포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외국의 어느 문헌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 그는 '음식으로 고칠 수 있다면 약은 그냥 약탕기에 두라'고 얘기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의 이름을 빙자한 근거 없는 말이 떠돌아다닌다. 모두 얄팍한 상술에서 비롯된 것을 다시 인용한 것들뿐인데 2천500년 전의 그리스 의사가 한국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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