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약재류 사진 곁들인 '향약집성방''동의보감' 편찬 신전휘 씨

백성들이 약초 쉽게 찾도록 하라던 어명, 수백년 만에 제대로 받들어

신전휘 회장이 자신의 한약방에서 자라고 있는 토종 한약재
신전휘 회장이 자신의 한약방에서 자라고 있는 토종 한약재 '울금'을 돌보고 있다.
신 회장이 펴낸 한약재 관련 서적들.
신 회장이 펴낸 한약재 관련 서적들.

16세기 말 선조가 말했다.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이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반인들도 쉽게 치료법을 이해할 수 있는 의학 서적을 편찬하여 전국에 보급하라."

1597년(선조 30년) 한양에서의 일이다. 당시 어의였던 허준 선생은 선조의 명을 받아 의학서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 광해군 5년(1613년)에 의학 백과서적인 '동의보감'을 만들었다. 한자로 쓰여진 동의보감은 그림이 없어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서적은 아니었다. 약재류의 이름만 있을 뿐 생김새를 그린 그림 등이 없어 백성들이 책을 이용해 필요한 약재류를 구하지 못했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는 선조의 어명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셈이다. 발간 400년이 지나서야 대구 약전골목에서 선조의 어명을 제대로 받든 '동의보감'이 이달 초 탄생했다.

'약초사진으로 보는 동의보감'. 동의보감에 나오는 약재류를 모두 찾아내 그림보다 더 정확한 사진을 찍고, 현대 한의학에서 확인된 각 약재류의 효능과 한약으로의 제조방법, 다른 의학서적과의 명칭비교, 영문 학명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선조의 어명을 제대로 받든 이는 약전골목에서 '백초당한약방'을 경영하는 신전휘(72) 대구경북한약협회 회장.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7년에는 성종의 어명도 받들었다. 성종은 1479년 어명을 내려 그림을 함께 담은 알기 쉬운 '향약집성방'을 만들어내라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왕명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527년이 흐른 2007년 신 회장은 사진이 함께 수록된 '한약집성방'을 내놨다. 조선의학서적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동의보감과 향약집성방이 모두 신 회장의 노력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어명을 받들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이 비싼 중국 약재를 수입해 병을 고쳐야 했습니다. 세종을 비롯해 성종, 선조 등 역대 임금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초를 어떤 백성들이라도 알 수 있게 책으로 알려주라'며 향약집성방, 동의보감 등을 만들었죠. 그러나 그림 없이 글만으로 어찌 백성들이 약재류를 알았겠습니까. 제가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지요." 그가 이 같은 꿈을 이루는 데는 산천이 두 번 바뀌는 시간이 걸렸다. 뜻을 세운 지 20여 년 만에 결실을 맺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래고 고된 작업이었다. 23일 백초당한약방에서 만난 신 회장은 오랜 여정을 끝낸 탓인지 허탈해 보였다.

작업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방방곡곡을 누볐다. 육지는 물론 제주도 10여 차례, 울릉도 4차례 등 섬지역도 마다않고 약재류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향약집성방에 나오지만 국내에서 발견이 안 되는 약재류는 중국까지 찾아다녔다. 중국에 15번 다녀왔다. 백두산은 5번이나 올랐다.

이렇게 해서 2007년 탄생한 것이 '향약집성방의 향약본초'. 17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계절에 따른 약초의 모습과 가공된 약재 사진 등 모두 1천800여 장을 수록하고 있다. 또 세월이 흐르면서 분화된 약초 등 20여 종에 대한 소개도 곁들여져 있다. 약재류 식별을 쉽게 하기 위해 1종류의 약재류 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진을 모두 담아냈다. 약초의 경우,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이 지는 등 모습이 변하니 어떤 계절에 찾아나서든 이 책만 들면 모든 약초를 식별할 수 있다. 약초 뿌리 사진과 약재로 가공된 모습도 함께 넣어 1종류의 약초마다 모두 6장의 사진이 붙어 있다.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냐고요? 헤아려 보지 않아 모르겠는데 서울 강남의 아파트 1채 값은 이 한 권의 책에 들어갔다고 봐야죠."

성종의 어명을 완수한 후 곧바로 동의보감 출간에도 뛰어들었다. 향약집성방이 먼저였지만 준비는 더 오래였다. 향약집성방이 이름 그대로 국내의 약초가 주가 됐다면 동의보감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현장답사와 몇십 년을 두고 우리 약초식물의 성장과정 살피기를 거듭했다. 멀리 중국, 동남아시아 등을 수십 차례 드나들면서 수만 장의 사진을 직접 앵글에 담아 3천여 장의 사진을 책에 담았다. 중국 등지에서 찍은 사진은 지명을 밝혀 신뢰도를 높였다. 책을 펼치면 먼저 컬러풀한 지면에 탄성이 나온다.

시각적인 효과도 효과지만 내실 또한 만만찮다. 약초식물마다 사계절 성장과정이 담겨 있으며 식물의 잎, 꽃, 열매, 뿌리 등 6, 7장 정도로 나눠 담아 약초의 일생을 사진으로 충분히 알 수 있게 했다. 특히 일반인들이 쉽고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설명을 붙였으며 국내외에 보고된 최신 의학정보와 중국과 일본 의서를 비교 분석해 놓았다.

이 책을 출간하기 위해 아예 출판사(도서출판 백초)를 차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전문서적이다 보니 맡아줄 출판사가 없었습니다. 원고와 사진을 정리하고 교열'편집까지 다했음에도 번번이 거절당했죠. 돈이 안 된다는 것이었죠. 책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어요."

◆부자유친

"약재류를 찾아다니는 것도 힘들었지만 400~500여 년 세월 동안 언어 변천이 심했기 때문에 동의보감이나 향약집성방 원본에 있는 한자로 된 약재류 이름과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약재류 이름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온갖 문헌을 찾으며 고증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죠."

책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투쟁이었다. 중국상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희귀 약초의 사진을 얻기 위해 5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이기도 했다. 편집 역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한 장의 사진을 편집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일일이 따고 초점을 맞춰 제작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지요."

많은 난관이 있었고 오랜 시간과 돈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아들과 함께여서 가능했다. 오히려 행복했단다. "경희대 한약학과 박사 출신인 아들(신용욱'40)이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아들 용욱 씨는 경희대 한약학과 재학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했다. 현재 진주산업대 작물생명과학과 교수로 있지만 틈틈이 책 발간을 위해 대구를 찾는단다. "책을 만드는 목적도 중요했지만 아들과 친해질 수 있어서 더 기뻤습니다. 특히 아들과 함께 외국으로 약초 사진을 구하러 다니면서 부자의 정을 돈독히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보람이었습니다. 부자유친을 한 셈이지요."

최근에는 미국에 있는 딸(영주'38)과 사위도 가세했다. 이 부부는 현재 동의보감의 영문판을 작업 중이다. 세계 속에 우리 한약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란다.

"올해가 동의보감이 세상에 나온 지 딱 4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400년이 흐른 지금, 한의학의 신세는 처량합니다. 현대의학의 위세에 눌리고 대체의학에 숨통이 조이고 있지요. 폐업으로 문이 굳게 닫힌 한의원이 늘고 있고 덩달아 한약재 판매상들도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약전골목에 한약재상이 새로 개업한 곳이 한 곳도 없어요. 한의학의 세계화만이 유일한 생존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풀잎 사랑

약초사랑은 숙명이었다. 아니 사랑할 수밖에 없었단다. 청송에서 태어나 빈농의 자식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안의 전 재산이래 봤자 논 3마지기가 전부였죠. 6남매가 배불리 먹기에는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풀을 뜯어 먹을 수밖에 없었지요. 들로 산으로 달래나 냉이를 찾으러 다녔지요. 자연스레 먹을 수 있는 식물과 없는 식물을 알게 되었죠." 배가 고팠지만 낭만(?)은 있었다. "풀잎으로 꽃 반지를 만들거나 향기나는 분꽃으로 동네 처자들도 많이 울렸지요. 허허허."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의 삶은 힘들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 낮에는 우동을 배달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한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땅히 배울 곳이 없었다. "당시에는 한의사가 되는 길이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지요. 그러나 지역에는 한의학을 배울 곳이 마땅히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서울로 못 간 것이 후회돼요."

군 제대 후 대구에 정착하고 나서야 약초를 연구할 수 있었다. 대구에서도 주경야독. 병원에 취직한 그는 낮에는 병원 일을 하고 밤에는 인근 한의원 등지에서 한약학을 공부했다. 5년 후인 1974년 약전골목에서 '백초당한약방'을 열 수 있었다. 비록 꿈꾸었던 한의사는 아니었지만 한약재를 다루는 일을 하게 됐다.

2007년 대구한의대학교로부터 명예 한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향약집성방의 향약본초'를 집대성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듬해에는 제5회 류의태'허준 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영남이공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요즘은 신이 난다. 웰빙바람과 맞물려 전통의학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하면서 자생하는 약초와 식용식물을 채취하면서 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참 기쁩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신전휘=1941년 청송에서 태어났다. 청송에서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1974년 대구 약전골목에서 백초당한약방을 차린 후 한약재 연구와 집필 등을 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중앙약사심의위원, (사)약령시보존위원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대구경북한약협회 회장으로 있다. 2008년 한의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5회 류의태'허준 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향약집성방의 향약본초' '우리약초 바르게 알기' '우리약초 꽃 408' '약초 꽃의 세계' '동의보감' 등이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