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Pho)는 베트남의 전통음식이다. 쌀로 만든 면에다 각종 야채와 삶은 고기를 고명으로 얹고 고기 국물을 부어 만든 '한 그릇' 음식이다. 반찬은 없고 맵거나 시큼한 간장 두 가지가 유일한 선택사양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식구들과 같이 퍼를 파는 집으로 가 좁다란 식탁에 옹기종기 둘러 앉아 식사한다. 한국에는 '베트남 쌀국수'로 알려진 퍼는 만들기도 간단하고 먹기도 간편해 1980년대부터 세계인의 음식이 됐다. 퍼가 일찌감치 세계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베트남 하노이의 이른 아침, 퍼 한 그릇에 행복해 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면 우리의 거리음식에서도 세계화의 요건을 발견할 수 있다.
◆길거리 상인들이 만든 베트남 쌀국수 퍼
베트남의 전통음식 퍼는 20세기 초 하노이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새벽이나 해질 무렵이면 양팔 저울처럼 생긴 막대 지게를 지고 나타난 길거리 상인들이 퍼 장수들이었다. 한쪽 바구니에는 장작불과 작은 솥을 얹고 다른 한쪽에는 면과 양념류, 향신료, 조리기구를 담아 거리에서 손님을 찾아다니는 퍼 장수들은 대부분 베트남 여성들이었다.
"일부에서는 퍼가 프랑스식 국수인 스튜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지배 이전인 1919년에도 하노이에서 퍼 행상이 성업 중이었다고 해요." 하노이에서 만난 베트남 교민 윤상호(51'무역업) 씨는 하노이의 향토 음식인 쌀국수가 프랑스인들에 의해 호찌민 등 남부지역으로 처음 전해지면서 오해를 부른 것이라고 했다. 쌀국수집을 안내하던 윤 씨는 "식탁이 너무 작지 않느냐"는 물음에 "쌀국수 한 그릇에 간장 두 종지, 젓가락이 전부이기 때문에 식탁이 클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퍼가 생겨나기 시작할 당시에는 국물에 계피향과 두부를 넣었지만 나중에 소고기와 닭고기를 삶아 국물을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1954년 베트남 독립 이후 하노이 퍼는 베트남 전역에 퍼져 나갔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향신료가 라임과 허브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986년까지 베트남 통일정부의 경제개발 기간엔 고기를 쉽게 구할 수 없어 인공조미료인 글루타민산나트륨(MSG)을 많이 쓴 퍼가 유행했지만 지금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하노이 퍼는 면발이 부드럽고 쫀득한 국수로 유명하지요. 면발은 쌀가루를 반죽해 얇은 막을 만든 다음 칼로 가늘게 썰어 만드는 것이 전통방식이지만 요즘은 대부분 국수공장에서 기계로 만듭니다."윤 씨는 "고명으로 삶은 소고기나 닭고기를 쓰거나 생선살은 튀겨서 쓰며, 국물에 향채나 양파, 파를 곁들인다"고 했다. 요즘에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고급 식당에선 베트남 앞바다에서 난 해산물이나 서양 야채를 써 퓨전화 하는 경우도 있다.
◆'저 자 취엔'의 소고기 퍼
하노이시 호안키엠 밧 단 49번지에 있는 '저 자 취엔'은 3대를 이어 온 전통 퍼 가게로 유명하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이면도로에 가게를 차렸는데 내부는 30㎡로 아주 비좁다. 이 좁은 가게에 하루 평균 600~700명의 손님들이 찾는다. 오전 11시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황(30) 씨가 둥근 나무도마에서 생강 채썰기에 한창이었다. 생강은 국물을 내는 소뼈의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들어간다. 생강을 썰고는 '엇'이라고 부르는 베트남 홍고추를 잘게 썬다. 청양고추보다 매운 엇은 소스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아침 장사는 오전 6시부터 시작되고, 오전 11시부터 저녁 장사 준비를 한다. 그래서 점심시간엔 장사를 하지 않는다. 가게 한쪽에는 소고기를 삶는 가마솥이 설설 끓고 작은 탁자마다 매운소스와 식초소스, 느엉마라는 검은 액젓이 놓여있다. 저 자 취엔의 관리책임자 응옥(38) 씨는"좋은 고기와 신선한 야채, 최고의 향신료를 쓰며 전통방식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고 자랑했다.
주인 탕(55) 씨와 부인 쑤안(52) 씨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도 준비된 재료가 떨어지면 식당 문을 닫는다. 탕 씨 부부는 번갈아 가면서 고명으로 얹을 삶은 소고기를 썰었다. 주인이 직접 고기를 썰어야 손님들이 미더워한단다. 오후 6시 저녁시간 전인데도 사람들이 돈을 들고 길게 줄을 섰다. 먼저 돈을 건네고 쌀국수 한 그릇을 받아 드는 방식이 이채롭다. 면을 그릇에 담는 일과 고기를 얹어 주는 일, 국물을 부어 주는 일은 종업원들이 따로 맡았다. 손님들은 가게 앞 길거리에 쭉 늘어놓은 좁다란 식탁에 모여 앉아 후루룩 맛있게 그릇을 비운다. 곁에 쪼그리고 앉아 국물 맛을 보니 구수하고 시원하다. 새하얀 면도 쫄깃하면서 미끄러지듯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나무탁자와 네모난 의자는 대를 이어 사용한 듯 손때가 묻어 가무잡잡하고 반들반들했다. 이 퍼 가게가 잘 되니 이웃한 이발관과 찻집도 덩달아 손님이 넘쳐난다.
대전시 오정동에서 왔다는 여행객 김민석(31'원자력연구소 연구원) 씨는"다른 데와 비교해 국물 맛이 다르다. 쫄깃한 소고기 맛도 기가 막히다"며 이마에 땀을 훔쳤다. 퍼 한 그릇은 1천200원 정도. 고명으로 얹는 고기를 끓는 물에 데쳐 낸 '타이난'은 300원 정도 더 비싸고, 중간 정도 익힌 '타이'가 1천200원, 푹 익혀 낸 '친'은 1천원이다.
◆고명과 국물에 따라 종류가 200가지 넘어
닭고기 퍼도 유명하다. 삶은 닭고기를 손으로 잘게 뜯어 면 위에 고명으로 얹는다. 채 썬 파와 미트볼을 꾸밈으로 넣고 닭 육수로 국수를 말았다. 하노이시에서는 아이바츰 래반후에 자리한'마이안 퍼가' 닭고기 쌀국수집이 손꼽히는 맛집이다. 가게 문을 연 지 올해로 32년째라는 마이안(62'여) 씨는"방목해서 기른 닭고기만 사용해 육수를 내고 고명을 만든다"며 "구운 생강을 함께 솥에 넣고 끓여서 닭의 비린내를 제거했기 때문에 구수한 맛이 특징"이라고 자랑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장사를 하는 이 가게에도 하루 700여 명이 찾는다. 식당 내부는 주방까지 다 합쳐도 60㎡ 정도인데 놀라운 매출이다. 한 그릇에 1천400원 정도. 미트볼이나 닭고기를 추가하면 300원을 더 받는다. 뜨끈뜨끈한 김이 나는 닭고기 퍼는 새하얀 면발에서 나는 은은한 산초향이 난다. 매운고추 다진 것을 넣고 라임 한 조각을 짜 넣으니 향이 더욱 상큼하다. 로즈마리 잎도 향신료로 쓴다. 고명으로 얹은 닭고기는 한국의 토종닭 맛이다. 면발은 꼬들꼬들하고 부드럽다. 칼국수처럼 납작한 면이지만 청포묵처럼 매끄럽다. 잘게 썬 생파가 닭국물과 어우러져 별스런 맛을 낸다. 마이안 씨가 식당 입구에 있는 육수 솥에서 건더기를 건져가며 재료를 하나하나 보여줬다. 닭고기는 물론, 닭뼈와 소뼈, 돼지족발도 보인다. 구운 생강과 표고버섯도 들어간다. 카노피라라는 생선을 강한 불에 튀겨 면 위에 고명으로 얹은 생선 퍼인 분까도 인기메뉴다.
베트남 전쟁 직후 나타난 난민 '보트피플'은 베트남 퍼를 세계화하는 데 일조했다. 보트피플은 세계로 흩어지면서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 호주 등 각 나라에 베트남의 맛을 선보였다. 특히 미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등 미국 동'서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내 베트남 퍼 식당의 연간 수입이 5억달러에 이른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다. 퍼는 지금 미국 서부 해안지역 대학과 기업 구내식당에서도 인기 높은 메뉴이며 2011년에는 CNN이 정한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50선' 중 28번째로 소개되기도 했다. 향신료와 양념, 재료에 따라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입맛에도 맞출 수 있는 점이 퍼의 위력이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작가'강병두 pi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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