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호랑이와 표범이 사라지면서 먹이사슬 맨 꼭대기를 차지한 동물이 멧돼지다. 깊은 산 속에 사는 멧돼지들은 먹이가 부족해지면 농가로 내려와 고구마밭 등을 파헤쳐 농작물 피해를 준다. 최근 도심에도 자주 출몰해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하지만 천적이 없으니 그들을 막을 방법은 사람이 나서는 것뿐.
멧돼지 피해를 막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들은 수렵장을 열고 '엽사'(獵師)들에게 멧돼지 사냥을 허용하고 있다. 단, 무분별한 포획이 아닌 개체 수 조절이 목적이고, 짜릿한 손맛은 엽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덤이란다. 우리 지역 멧돼지 사냥 현장으로 들어가 봤다.
◆멧돼지 사냥 대작전
26일 오전 10시쯤 성주군 용암면 한 야산. 사냥견 5마리가 엽사 박종훈(60) 씨의 손짓과 함께 산속으로 흩어졌다. 이 사냥견들은 후각에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멧돼지 냄새를 쫓는 것이다.
박 씨는 사냥견들의 목줄에 장착된 GPS(위성항법장치)가 보내는 신호를 계속 살폈고, 사냥견들의 위치가 멀어지자 "고라니를 쫓는 거라면 이렇게 멀리 가지 않는다. 분명 멧돼지를 쫓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냥견이 귀하던 옛적에는 사람이 꽹과리를 쳐 신호를 보내는 몰이꾼 역할을 했단다.
박 씨는 산을 오르며 부지런히 땅바닥을 살폈다. 그는 멧돼지 추정 발자국을 가리키며 "멧돼지는 발가락이 모여 있고, 고라니는 발가락이 양 갈래로 퍼져 있다. 발자국 크기로 가늠해보니 무게가 200근 정도 되는 멧돼지인 것 같다. 근처에 있다"고 했다.
정오쯤 박 씨의 무전기로 교신이 수차례 오갔다. 작전 회의였다. 이날 멧돼지 사냥에 나선 엽사는 박 씨를 포함해 모두 8명. 이들은 산 양끝에서 사냥견들을 끌고 이동하며 멧돼지를 포위하는 임무, 포위당한 멧돼지의 예상 도망 경로마다 엽총을 들고 길목을 지키는 임무, 차량으로 운송 및 물품 지원을 하는 임무 등을 나눠 맡는다. 이들은 지루한 수색의 시간을 보내다 "준비하라"는 박 씨의 말과 함께 본격적인 멧돼지 사냥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제법 확실해 보이는 멧돼지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사냥견들의 움직임은 더욱 분주해졌고, 엽사들이 서로 상황을 알리는 무전 교신도 바삐 오갔다. 종종 고라니들이 산속을 가로지르며 지나쳤지만 엽사와 사냥견들의 관심 밖이었다.
이후 3시간여 동안 산 능선과 골짜기로 약 10㎞를 이동하는 사냥 작전이 펼쳐졌지만, 끝내 멧돼지는 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멧돼지를 놓치는 날도 있습니다. 대신 멧돼지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등 수색 임무는 성과를 얻었으니 내일 사냥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하산하는 길에는 멧돼지가 이빨로 나무를 훼손한 흔적과 묘소를 파헤친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박 씨는 "분명 조금 전에 멧돼지가 있었던 흔적"이라며 아쉬워했다.
◆흔치 않은 레저 스포츠, 멧돼지 사냥
이날 멧돼지 사냥에 나선 엽사들은 전국수렵인참여연대 성주군지회 회원들이다. 모두 엽사 말고 다른 직업을 갖고 있지만 20여 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들이다. 이들은 고향인 성주에 올해 4년 만에 수렵장이 열리자 개장일인 이달 1일부터 폐장 예정일인 내년 2월 말까지 4개월간 멧돼지 사냥에 나서고 있다. 회원들 중 최고령인 임병수(72) 씨는 "성주는 사계절 내내 참외 농사를 짓는 특성상 멧돼지들도 사계절 내내 참외 하우스를 습격해 피해를 끼친다. 이번 수렵장에서 멧돼지 개체 수를 줄여야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멧돼지 사냥은 농작물 피해를 막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흔치 않은 레저 스포츠이기도 하다. 이존호(71) 씨는 "보통 3, 4개월 동안 멧돼지 사냥을 하면 각종 경비가 250만원 정도 드는데 회원들 스스로 레저 비용으로 부담한다"고 했다.
겨울철에 열리는 수렵장 외에도 농작물 피해가 심할 때마다 지자체가 경찰서에 위임해 '유해조수 수렵기간'을 운영하면 이때에도 엽사들이 출동한다.
회장 박종훈 씨는 "멧돼지 외에도 고라니 등 유해조수가 기승을 부릴 때 기꺼이 나선다"며 "고향 지리를 잘 알아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공익과 취미를 모두 충족하려면 무엇보다도 안전이 최우선이다. 박 씨는 "밝은 색 옷과 모자, 안전장비를 반드시 착용하고, 현장에서는 엽사들끼리 의사소통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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