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불우(不遇)한 풍경, 인문학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내 초로(初老)의 가을에, 상처라는 말은 남세스럽다. 그것을 모르지 않거니와, 내 영세한 필경(筆耕)은 그 남세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다.(김훈의 '풍경과 상처' 중에서)

나는 늘 내 삶이 남세스럽다. 내 삶에는 풍경 안에도, 풍경 바깥에도 상처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내가 걸었던 길의 언저리에는 언제나 내가 내려놓은 흉터들로 아프다. 그것을 그것대로, 풍경은 풍경대로 내려두면 좋을 터인데 기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쉽게 풍경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미 나에게는 그 모든 시간들이 그것대로의 의미만 지닐 뿐이다. 풍경은 풍경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내 삶이 남세스러운 것은 삶 자체의 남세스러움을 넘어서 존재한다. 넘어서 존재함으로 인해 내 남세스러움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풍경으로만 기억하고 싶은데 현재진행형인 남세스러운 풍경은 모두 상처의 풍경이 되어 나를 찌른다. 그게 힘들다. 그것들로 인해 삶의 풍경은 언제나 가장 불우(不遇)한 풍경이 된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소위 인문학이란 제목이 붙은 책들을 읽어나갔다. '인문학은 밥이다' '절망의 인문학' '희망의 인문학' '모든 순간의 인문학' '일상의 인문학' '인문학 콘서트 1, 2, 3' '저항의 인문학' '행복한 인문학' '통합의 인문학' 등. 지면 관계로 나열하지 못한 책이 더 많다. 출판계의 불황이 길어지고, 출판계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편중이 나타나는 지금 상황에서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오르기는 어려워도 인문학은 제법 인기가 있는 출판 아이템이다.

대학에서도, 문화계에서도, 공공도서관에서도, 심지어 기업에서도 인문학 강좌가 열린다. 국회에서는 인문학 진흥과 관련된 법안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만하면 인문학이 대세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양한 인문학의 풍경 중에선 오히려 불우한 것이 더 많다. '~의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인문학 판촉 활동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물론 위에 제시한 책들 중에서 감동적인 내용을 지닌 책도 많다. 다양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인문학 관련 활동 중에서도 아름다운 풍경이 많다. 하지만 인문학이 대세라면 최소한 아이들이 행복해야 한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다루는 학문이다. 인문학에서는 최소한 불행과 행복이 반대 개념이 아니라 교차되는 관계다. 인문학은 그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지금부터라도 그 일을 하려고 한다. 추진하기 위한 팀은 꾸렸고, 남은 일은 실천이다. 작은 시작이 많은 이들에게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우연히 '끔찍한 공백…'이란 단순한 문장을 읽었다. 거기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시간을 증명한다. 이제 조금씩 내 몸의 세포가 늙어가고 있나 보다. 자주 지치고, 자주 힘에 부친다. 매번 몸이 말을 하면서 말과 몸이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하나의 풍경일 뿐이다. 그 일상적인 풍경을 통해 나는 여전히 세상과 소통하고 나와 소통한다. 나름대로 절박하지만 그 절박함으로 인해 오히려 사소하다.

그렇다. 요즘 나는 언제나 나 스스로 미달이다. 어디엔가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절박함으로 인해 늘 미달이다. 닿을 수 없는 대상들은 언제나 그리움을 만들고 절실함을 만든다. 닿을 수 없는 대상은 역설적으로 거기에 닿으려는 마음을 창조한다. 아름다운 교육, 그리고 그것으로 행복한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 것이 내가 닿으려고 하는 마음의 좌표이다.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을 통해 '끔찍한 공백'을 벗어나고 싶다. 정말 그것은 나에게 닿을 수 없는 대상일까?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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