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길-이하석(1948~)

나무 사잇길이 밝게 부르는 것 같다.

흐르는 마음이 닦아서 편편해지는 게 길의 힘이어서

산비탈도 길로 내려서면 나른해진다.

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집에서 나와

가출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기척에도 귀 기울이며

사람들은 제 설렘들을 몰래 그 길에 내어 널어 말린다.

사람들이 오간 기억으로 길은 굽이친다.

아침에 길 쓸며 제 갈 길 닦은 이는 제 길의 은짬에서 낮에 죽고

누가 그를 길 없는 비탈로 밀어 올리는지 가파른 산길이 새로 생겨난다.

그 길은 추억들로 환해지다 닫히리라

바람도 한동안은 그 길로 해서 산자들의 마을길을 기웃거리리라.

아침에 또 누가 그런 바람이 부산하게 다녀간 길을 쓴다.-시집 『상응』(서정시학, 2011)

"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집"을 무심코 오고가는 일상을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상도 느닷없는 곳에서 멈추고 나면 다시는 오갈 수 없는 소중한 길로 남을 것이다. 김소연 시인의 시 「막차의 시간」에는 이런 일상을 "아침이면 방에서 나를 꺼냈다가/ 밤이면 다시 그 방으로 넣어주는 커다란 손길/ 은혜로운" 그 무엇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은혜로운 손길도 유한한 인생의 손목을 영원히 잡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 손길을 놓치고서야 사무칠 손길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어느 '은짬'에 가서는 느닷없이 구성진 상엿소리가 요령 소리를 타고 들려온다. 일상으로 오고 가던 길 위의 인생이 사설로 풀어지고,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파른" 북망산 노정이 꿰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 시는 어떤 드라마틱한 삶의 이승과 알지 못할 저승의 이야기를 길이라는 이미지에 농축한 상엿소리다. 이하석 시인 특유의 묘사가 가진 힘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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