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로서 가수를 겸했던 김연실은 1910년 경기도 수원군 고장면 매탄리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평안도 성천과 황해도 해주에서 군수를 지낸 김연식(金蓮植)이었고, 그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수원 화성의 삼일여학교를 다니던 13세 무렵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두 해 뒤에는 모친마저 사망했습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김연실은 주위사람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지만 결국 그 혼인은 실패로 돌아가고 다니던 학교도 중퇴했습니다. 오빠 학근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극장 단성사에서 청년변사를 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갔습니다.
오빠의 추천으로 김연실은 17세에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신조아리랑'을 영화필름이 돌아갈 때 단성사에서 육성으로 불렀습니다. 이때 오빠는 나운규(羅雲奎)에게 여동생을 소개했고, 그 인연으로 김연실은 영화 '잘 잇거라'에 배우로 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김연실의 첫 출연작품입니다. 1926년 고학으로 서울 근화여학교를 마쳤지만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고 소녀가장이 되어 동생을 돌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김연실이 출연했던 영화는 1928년의 '옥녀' '삼걸인' '철인도' '낙화유수' '세 동무' 등입니다. 1929년에는 금강키네마로 이적해 영화 '종소리'에 여주인공 애경 역을 맡아 출연합니다. 영화 출연도 많았지만 이 무렵 김연실의 생활은 몹시 곤궁하고 힘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김연실은 이기승(李基升)이란 청년과 깊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연애를 이기승의 부모가 격렬히 반대하자 이기승은 미국유학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유학 후 그는 김연실과 태평양을 오가는 무려 330여 통이 넘는 러브레터를 주고받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김연실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5년 동안 영화 '명일의 여성' '어머니' 등과 연극 '수일과 순애' '아리랑고개' 등에 분주히 출연하였습니다. 배우로서의 입지도 탄탄해졌습니다.
1935년 김연실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기승과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며 영화계 은퇴를 선언합니다. 1936년부터는 서울 충무로의 다방 '낙랑파라'를 인수해서 '낙랑'(樂浪)으로 이름을 바꾸고 주인마담이 되어서 운영을 합니다. 서울의 많은 문인, 화가, 영화인 등 문화계 인사들이 이곳을 아지트처럼 드나들었습니다. 김연실은 연주회와 레코드감상회 등을 자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로 접어들면서 다방에 대한 총독부의 감시와 규제는 더욱 심해졌고, 이에 답답해진 김연실은 다방을 폐쇄한 뒤 가족들과 만주 신경으로 떠나게 됩니다.
1938년 남편은 일본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만주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고생스럽게 살아가다가 1940년 영화 '복지만리'(福地萬里) 촬영 팀과 합류하게 되면서 그들을 따라 서울로 되돌아옵니다. 일제강점기 말 김연실의 삶은 고협(高協)의 멤버로 활동하는 친일영화인의 면모를 나타냅니다. 소녀가극단을 꾸며 북경과 신경 등지의 일본군위문공연도 다녔습니다.
8'15 해방이 되자 다시 영화인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해서 '노도'(怒濤) 등 여러 연극무대에 출연했습니다. 김연실의 마지막 영화 출연은 1949년 '돌아온 어머니'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김연실은 당시의 남편 김혜일(金惠一)과 함께 월북합니다. 김혜일은 화가이자 좌익 언론인이었습니다. 북에서 김혜일은 '피바다' 등의 영화미술을 담당했고, 김연실은 영화 '정찰병' '유격대 오형제' 등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김연실의 딸 김계자(金桂子)는 외삼촌의 손에 성장하여 재즈가수가 되었습니다. 북에서 김일성의 칭찬을 받으며 인민배우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김연실은 1997년 87세로 사망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