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박근혜와 문재인을 바보로 만들려는가?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 폐지와 씨름을 했다. 정치학 교수로서, 지방분권 사회운동가로서 각종 토론회에 나가고 글을 쓰고 방송에도 출연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한 해를 보냈다.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는 어려운 고비가 있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작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근혜 후보, 문재인 후보가 국민들에게 폐지 약속을 했고, 대선이 끝난 후에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약속 이행을 확인했다.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재창 숙명여대 교수는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제 폐지가 마땅하다는 의견을 밝혔으며 황우여 대표는 그것이 당론이나 다를 바 없다는 얘기를 지방지 기자들에게 했다. 민주당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기초자치선거정당공천찬반검토위원회를 만들어서 폐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받은 후 그것을 전체 당원 투표에 부쳐 당론으로 결정을 했다.

초가을까지,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 낭패감에 젖어 있다. 이 일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지난 27일 오전 공청회를 열어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 공청회에 진술인으로 참석한 나는 두 당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고 덜컥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새누리당은 폐지 반대를 분명히 하는 것 같았다. 새누리당 추천으로 나온 진술인들은 하나같이 폐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폐지하지 않겠다는 새누리당의 의지를 읽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민주당의 태도도 석연치 않았다. 민주당은 폐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확실한지 의문이 들었다. 민주당 추천으로 나온 진술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폐지를 강조했고, 한 사람은 폐지라고 했지만 입장이 흐릿했고, 한 사람은 유지가 좋다는 의견을 진술했다. 폐지를 당론으로 정한 민주당이 진술인 추천을 그렇게 한 배경이 뭔가라는 의문이 들 만큼 어이가 없었다.

회의장을 들락거리다가 회의가 끝날 때 즈음에는 자리에 남아있는 국회의원들이 거의 없었던 것은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어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을 받았다. 아, 이러다가 또 흐지부지되는 것이 아닐까.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머리가 쪼개지듯 아팠다. 어두운 차창에 지난 한 해 동안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위해 뛰어다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 열이 식지를 않아 친구들에게 문자로 분통을 터뜨렸더니 이런, 회신이 가관이다. 위로 섞인 핀잔이 대부분이다. 이 바보 같은 교수야. 국회의원들 손에 넘어가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이제 알았나?

내가 바보였나? 아니다.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약속한 일이 아니었던가? 박근혜, 문재인 두 분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지 않은가? 나는,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기가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자기 세력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가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 폐지 결정을 어물어물 회피하려는 국회의원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논리는 그것이 위헌일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이다. 나는 국회의원들에게 묻는다. 나는 아니라고 보지만, 그래 위헌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하자. 그러면 폐지를 공약한 두 대통령 후보는 뭐가 되나? 만일 박근혜 후보나 문재인 후보가 위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르고 국민들에게 공약을 했다면 두 분은 무능했다는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위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도 단지 국민들에게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을 한 것이라면 두 분은 포퓰리즘에 기댄 위선적 선동가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초자치선거 정당공천 폐지 결정을 머뭇거리면서 '고추 먹은 소리'를 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우리의 소중한 지도자,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의원을 바보로 만들려는가?

김태일/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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