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성 십리 허(許)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불로동 고분군에서 '성주풀이' 가사를 떠올렸다면 감정 과잉일까. 중국 허난(河南)성의 낙양시는 중국 최대의 고분군으로 유명하다. 청나라 때까지 수십만 기의 무덤이 쓰였다고 하니 '장송(葬送)의 언덕'이요 '무덤의 계곡'이라고 할만하다. 백제인 흑치상지(黑齒常之), 의자왕의 아들 륭(隆), 연개소문 아들인 남생과 남산이 묻힌 곳으로도 알려졌다.
묘는 단순히 사체를 묻는 매장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덤은 인류 최초의 건축물이었고 장례는 인간이 치른 첫 의식 행위였다.
고대 인류의 생사관이 집약된 곳 고분, 대구에도 많다. 불로동 고분은 규모에서 한반도 어느 고분군에도 필적할 만하다. 불로동에만 211기가 있고 바로 인접한 봉무동, 단산동, 도동 고분군까지 합치면 300기를 훨씬 넘어선다.
'불로동 십리 허'에 묻힌 고대인을 찾아 동구로 떠나보자.
◆삼국시대 이후 거대 고분군 축조=인류가 시신을 매장하기 시작한 것은 7, 8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 후기 구석기에 들어오면서 장례의식은 내세(來世), 발복(發福) 신앙으로 발전한다.
삼국시대 이후 왕족, 귀족들은 생전의 권력을 과시하고 영향력을 사후까지 연장하기 위해 대형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가야고분, 경주의 왕릉, 임당고분 등의 이 시기의 분묘다.
무덤 안에는 갖가지 부장품을 묻었다. 고인이 쓰던 물건은 물론이고 순전히 껴묻거리 용도로 제작된 물건들도 있었다.
불로동 고분군은 대구 분지 북동쪽에 있으며 금호강의 북안(北岸) 에 접해 있다. 고분들은 대략 해발 50~80m. 동서로 뻗은 줄기와 북서쪽으로 뻗은 구릉의 경사면에 위치한다. 분구 규모는 대략 6~30m로 다양한 편이며 8~12m 내외가 가장 많다.
◆불로동 고분군의 피장자는 누구?=불로동 고분군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피장자들이 누구냐 하는 점이다. 어떤 집단이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수백 기가 넘는 대형 묘역을 조성했느냐에 대한 의문이다.
그 의문에 해답을 얻으려면 먼저 축조 연대에 대한 답부터 구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무덤 양식, 장법(葬法), 널 구조로 볼 때 조성 연대를 5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다. 편년으로 보면 삼국시대 초, 중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본격적으로 국가가 나타나는 시점이다. 이웃한 경주에서 사로국이, 경산에서는 압독국이 생겨났다. 대구 지역엔 지금의 평리동, 비산동 일대에 달구벌 세력이 존재했다.
지역엔 달구벌 세력 외에 5개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다. 전문가들은 이들 집단 중 불로동, 동촌 일대 세력들이 불로동 고분 문화의 주인공으로 판단하고 있다.
◆불로동 세력은 초기엔 대구권, 후기엔 신라권=불로동 고분군 집단이 대구에 속해 있었나, 신라의 수하(手下)였나도 학계에선 관심거리다.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불로동 세력은 처음엔 달구벌국에 속해 있었다가 4, 5세기 무렵 신라가 급속히 팽창해 가는 과정에서 사로국 휘하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도 "토기 등 유물의 형태와 질을 비교해 볼 때 경주 지방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고 지적하고 "5세기 전후에 경주의 영향권에 있던 압독국 수하에 속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진단했다.
다음은 고분에 매장된 부장품을 들여다보자. 부장품은 당시의 생활상은 물론 미(美)의식, 문화, 신앙, 기술 수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최고의 자료다. 불로동 고분군은 1938년 일본 학자에 의해 입석동에 있던 해안 1호, 해안 2호 2기가 조사됐고 1964년에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다시 2기가, 2002년 경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91, 93호분이 공식적으로 발굴되었다.
이 발굴에서 완(碗), 장경호(長頸壺'목항아리), 대호(大壺) 등 토기 360점이 출토됐고 철촉, 철모, 꺽쇠, 철도끼, 귀고리를 비롯한 금속, 옥석류도 187점이 나왔다. 그러나 이곳 지배층의 위상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인 왕관이나 칼, 금대(金帶) 같은 위세품은 적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출산 과정에서 희생된 모자, 무덤서도 나란히=분구(墳丘)의 형태에서도 많은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났다.
불로동에서는 봉분 하나에 여러 유구를 쓰는 다장분(多葬墳)이 많이 보인다. 91호분에서는 하나의 본분에 13개의 주, 부곽이, 93호분에서도 같은 수의 석곽이 발견되었다. 특히 봉분 2개를 잇대 여러 분구를 합장한 표주박 형태로 추정되는 봉분도 나와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표주박 형은 경주 황남대총 등에서만 보이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고분 양식이다.
91호분에서는 가족묘로 보이는 석곽이 출토됐다. 한 석곽에서는 4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나왔고 바로 옆 옹관에서는 유아, 어린이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돼 가족관계 또는 모자(母子) 관계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단정할 수 없지만, 분만과정에서 산모와 아이가 같이 희생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마무리하며=불로동 고분 유적에 대한 여러 의문이나 미스터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정치체제와 관련해 불로동 세력이 대구권에서 사로국 세력으로 편입된 시점에 대한 논란은 먼저 풀어야 할 과제다. 불로동 고분군이 포함된 금호강 북쪽 일대 장산군 해안현을 대구권으로 볼 것인가, 경산권으로 해석할 것인가도 논쟁거리다.
거대한 고분군의 축조 세력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해 생활유적이 주변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 또한 미스터리다. 300여 기 이상의 분묘를 축조할 세력이라면 수천 호 이상의 성읍 규모다. 그런데도 고분 근처나 인근에서 생활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앞으로 매장 주체에 대한 신분이나 위상의 판단 근거인 왕관이나 위세품의 출토 여부도 중요한 연구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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