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년병들, 끝나지 않은 6.25

물지게 지고 가다, 학교 모였다가 강제징집,전쟁중 겪은 육체적 정신적 충격…합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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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발발 한지 6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전선의 포성은 아직 귓가를 울리고 있다. 10대 어린 나이에 무거운 소총을 끌며 전장을 누빈 소년병들. 20일 대구 앞산공원 내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제17회 6'25참전 순국소년병(2,573위) 위령제에서 소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한 참석자가 추도사 낭독 중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6'25전쟁이 발발한 지 64년이 됐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전 참전 소년'소녀병(이하 소년병)들이다. 대구경북의 80대 소년병들이 '64년 전 징집은 위헌'이라는 헌법 소원을 제기(본지 19일 자 1면 보도)한 것과 관련, 소년병들에게 합당한 예우와 보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5~17세 시절 입대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당시 15세였던 장병율(80'대구 달서구 상인동) 씨는 물지게를 짊어지고 대구 중구 덕산파출소 인근으로 가던 중 경찰관에게 강제로 징집돼 육군에 입대했다. 장 씨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인민군 소탕작전을 펼친 뒤 4년 4개월 복무를 마치고 1954년 12월 제대했다.

17세였던 장성곤(81'대구 수성구 연호동) 씨는 대구 고산고등공민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장 씨는 어느 날 교무직원이 찾아와 '학교로 지금 당장 나와라. 만약 오지 않을 시에 총살을 당할 것이다'는 얘기를 듣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트럭에 강제로 실려 대구 덕산국민학교로 갔다. 5일간 군사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배치됐다. 그는 "집에 알리지 못해 부모님이 이틀 동안 애타게 찾아다녔다"면서 "군복이 너무 커서 몸에 맞지 않았다"고 했다.

박태승(81'영주 풍기읍) 씨는 당시 17세였다. 전쟁 때 야전병원 도우미 역할을 하던 중 육군 대위의 권유로 육군에 입대했다. 박 씨는 4년 6개월의 복무를 마치고 1955년 2월 제대했다.

윤한수(79'대구 달서구 도원동) 씨는 15세이던 1950년 8월 대구 계성중학교 4학년에 다녔다. 윤 씨는 2대 독자였지만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소집된 뒤 배속장교의 권유를 받고 육군에 입대했다. 윤 씨는 4년여의 복무를 마치고 1954년 5월 2대 독자라는 이유로 의가사 제대했다.

하명윤(82'대구 동구 방촌동) 씨는 1950년 8월 당시 17세로, 영천 신령중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교감선생님의 훈화를 듣고 육군에 입대해 4년간 복무를 마치고 1954년 제대했다. 당시 교감은 "조국이 위급해 공부할 여건이 안된다. 펜대를 총으로 바꾸자"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어린 나이 참전 인생 뒤틀려

전쟁기간을 포함해 치열했던 4년간 군 복무는 어린 나이에 참전한 소년병들의 인생을 뒤틀었다. 전쟁 중 겪은 육체적'정신적 충격은 잔혹한 외상 후 스트레스로 남아 괴롭혔다.

장병율 씨는 징집 당시 이웃집에 초상이 나면 무서워서 외출도 못하던 15세 소년이었지만 자신의 키만큼 큰 총을 어깨에 메고 전장을 누볐다.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사지가 떨리고 무서웠지만 살기 위해 총부리를 동족에게 겨눠야 했다. 전쟁은 장 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친구들도 눈에서 살기가 느껴진다면서 피했다. 전쟁에서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매일 밤 그를 괴롭혔다. 소년병으로서 참전 이력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아 평생 일용직을 전전해야 했다.

장성곤 씨는 총을 지급받은 날 밤중에 비상동원돼 바로 전쟁터로 갔다. 사람을 죽였고 처절하게 발악도 했다. 역겨움에 기절도 했고 힘겨움에 눈물이 마른 날이 없었다고 했다.

윤한수 씨는 전쟁에서 다쳤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오른쪽 팔꿈치를 완전하게 뻗지 못한다. 하지만 군병원 기록이 없어 상이 신청도 못 하고 있다.

박태승 씨는 1950년 11월을 잊지 못한다. 평안북도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를 하면서 정신없이 탈출하던 중 청도에 산다는 이름도 모르는 15세 소년병과 함께 낙오됐다. 소년병 전우는 유탄을 맞고 쓰러졌다. 처음에는 박 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같이 가자고 애원하던 소년은 차츰 기력이 약해졌고 '자기를 죽이고 가라'고 애원했다. 박 씨는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면서 "당시 죄책감에 평생 죄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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