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라 천년의 타임캡슐 왕릉 기행 어서 오세요

경주 신라 왕릉 투어

성덕왕릉 진입로는 굴곡진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성덕왕릉 진입로는 굴곡진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삼국통일의 기틀 마련

선덕여왕릉 봉분 아래 자연석 덧대

묻힌 사람 가장 정확한 건 무열왕릉

신라 천년 역사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은 삼국통일 시기이다. 왕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전쟁과 외교를 통해 이룩한 통일이었다. 이 시기 손꼽히는 왕이 '선덕여왕'과 '무열왕'(김춘추)이다. 각각 최초의 신라 여왕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우선 낭산 중턱에 있는 선덕여왕릉을 보면 호석이 눈에 띈다. 6.8m 높이의 봉분 아래에 자연석을 댔다. 작게는 주먹만 한 것에서 크게는 어른 팔 한 아름에 달했다. 돌을 다듬지 않고 각자 크기와 모양에 맞춰 호석으로 사용했다. 선덕여왕은 왕권 안정과 중앙집권체제 강화에 기여했다. 당나라와의 친교를 통해 외교적 고립 상태를 벗어나고자 했다.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분황사를 창건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조성하는 등 문화적인 성과도 거뒀다.

현재까지 남아 관광 명소가 된 첨성대도 선덕여왕의 작품이다.

무열왕릉은 특히 눈여겨봐야 한다. 신라의 능과 묘 중에 묻힌 사람이 가장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도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능은 지름 36m에 높이가 8.7m이다. 봉분 아래에 호석을 댔고 이를 보강하는 받침석을 설치했다. 이는 고구려 무덤 양식으로 무열왕릉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능 앞에는 길게 다듬은 돌로 꾸며진 상석이 있다. 상석이 등장한 첫 사례이고,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까지 이어지며 보편화됐다. 능과 50여m 떨어진 곳에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다. 비석의 몸체는 없어졌지만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머리 부분인 이수(首)가 남아 있다. 비를 세운 것은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고구려와 당나라 문물의 도입은 김춘추의 삶에도 드러난다. 왕이 되기 전 그는 뛰어난 외교가였다. 목숨을 걸고 고구려를 찾아가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적대국이자 백제와 친했던 왜국에 건너가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당나라 태종을 만나 나당동맹을 결성했다. 왕이 된 후에는 백제를 멸망시키며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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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封墳)=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만든 무덤이다.

호석(護石)=둘레돌. 능이나 묘의 둘레에 돌려 쌓은 돌을 말한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십이지를 상징하며 각각 방향과 시간을 맡아 지키고 보호하는 열두 가지 동물의 상(像). 능의 둘레돌에 조각돼 수호신 역할을 한다.

난간석(欄干石)=능 주위를 동그랗게 두르는 돌로 만든 난간이다.

상석(床石)=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이다.

석사자상(石獅子像)=돌로 만든 사자 모양의 조형물이다.

석인상(石人像)=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조형물이다. 문인상과 무인상으로 나뉜다.

◇전성기 맞이한 통일신라

신문왕릉 벽돌 모양 호석 5단 쌓아

십이지신상 신라만의 독창적 양식

통일을 이룬 신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왕릉의 양식도 함께 발전했다. 676년 삼국통일 이후 100년 사이의 '신문왕'과 '성덕왕' '경덕왕'을 주목해야 한다. 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맏아들인 신문왕의 능(높이 8m)은 무열왕릉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자연석이던 호석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해 5단으로 쌓았다. 삼각형 모양의 받침석 44개를 설치했다. 남쪽 받침석에 문(門) 자를 새겨 출입구임을 표시했다. 상석은 1단의 무열왕릉보다 높은 2단으로 하고 계단 시설을 더했다.

진일보한 왕릉처럼 신문왕은 개혁을 통해 통일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대표적으로 국학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고, 9주 5소경이라는 지방제도를 확립해 왕권의 기틀을 다졌다. 수도를 경주에서 대구(당시 달구벌)로 이전하려 했다. 경주 중심의 귀족 기득권을 분산하기 위해서였다. 대구는 지리적으로 국토 중심부라는 이점과 낙동강과 금호강의 뱃길 물류에 편리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수도 이전은 아쉽게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됐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인 성덕왕의 능(높이 4.5m)에 이르러 신라 왕릉의 전형이 확립됐다. 신문왕릉의 5단 호석은 1개의 넓은 돌로 대체됐고, 호석 윗부분의 여러 돌은 1개의 긴 돌로 마무리했다. 특히 이전에 없던 요소가 더해졌다. 받침석 사이의 십이지신상, 봉분을 두른 난간석, 석사자상과 석인상 등이 등장했다. 십이지신상은 신라만의 독창적인 양식이었고, 난간석과 석사자상은 불교문화와 왕릉제도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있다.

성덕왕은 나당전쟁 이후 교류가 끊겼던 당나라와의 외교를 정상화했다. 자영농민의 토지소유를 인정한 정전제도를 통해 국가재정의 안정을 꾀했다. "고려 문종대왕, 조선 세종대왕 등과 함께 신라에 성덕대왕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태평성대를 이뤘다.

성덕왕의 차남인 경덕왕의 능(높이 6m)에선 받침석이 사라진다. 십이지신상은 돌에 새기는 형식으로 바뀐다. 석사자상과 석인상이 없이, 난간석과 상석만 설치됐다. 경덕왕은 안정된 국정을 바탕으로 문화융성을 이끌었다. 아버지를 기리는 뜻에서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을 만들기 시작해 다음 왕인 혜공왕 때 결실을 보았다. 불국사를 창건하고 석굴암을 축조하는 등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이 시기에 월명사와 충담사가 활동하는 등 향가가 발전했다.

◇왕릉제도의 완성과 쇠퇴

원성왕릉 무인상 서역인 모습 담겨

900년도 전반부터 호석 왕릉 사라져

신라 왕릉 중 한 곳만 꼽으라면, 선택은 원성왕릉(높이 7.7m)이다. 신라 왕릉제도의 집대성이기 때문이다.

왕릉은 토함산 서남쪽 낮은 언덕에 있다. 원형 봉분 아래에 무기를 들고 갑옷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을 두르고 상석이 놓여 있다. 능과 80여m 떨어진 곳에 8각형 화표석(華表石'무덤 앞에 세운 문), 무인상과 문인상이 각각 한 쌍, 석사자상 두 쌍이 있다. 당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신라 왕릉의 완성된 형태이다.

특히 무인상이 눈길을 끈다. 매부리코와 턱수염을 기른 주걱턱을 가진 서역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뒷모습을 보면 서역인이 차고 다니던 작은 주머니가 있다. 당나라에서 용병으로 유명했던 중앙아시아인이나 무역상으로 명성을 누리던 아랍인으로 추정된다. 실크로드 무역이 활발했던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원성왕릉의 양식은 이후 헌덕왕릉(41대왕'809~826년)과 흥덕왕릉(42대왕'826~836년)에도 적용됐지만, 정치적 혼란과 국력의 쇠퇴를 겪으면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836년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왕족 내 계파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혼란이 심해지면서 신라는 정치와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내리막을 걸었다.

시대 상황이 왕릉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규모가 줄고, 석사자상과 석인상이 사라졌다. 십이지신상도 없어졌다. 호석 역시 자취를 감췄다가 헌강왕릉(49대왕'875~886년)과 정강왕릉(50대왕'886~887)에서 벽돌 모양으로 재현되는 데 그쳤다.

900년도 전반부터는 호석을 갖춘 왕릉이 등장하지 않았다. 봉분 규모만 민간 무덤과 다를 뿐 왕릉의 위엄은 사라졌다.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은 "경제 침체와 외교'안보의 위기 등 현재의 문제를 푸는 해법을 왕릉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진 원장은 "전성기 왕들은 목숨을 걸고 외교와 전쟁에 나서는 등 리더가 솔선수범을 보였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해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며 "사사로운 이익보다 나라 전체를 위한 정책을 통해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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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경] 영양숯불갈비

◆쌈밥'갈비'순두부…한식 천국

◇포구나무집=민물매운탕 전문점, 숲머리길 141 (보문동), 054)746-2468

◇최가밥상=전통한정식, 교촌안길 21(교동), 054)775-7557

◇옛정=불고기 한정식, 윗동천길 42(동천동), 054)742-6581

◇삼포쌈밥=쌈밥전문점, 계림로 14(황남동), 054)749-5776

◇온정쌈밥=쌈밥전문점, 첨성로 153(황남동), 054)772-2256

◇영양숯불갈비=갈비 전문점, 봉황로 79(서부동), 054)771-2626

◇귀하한정식=한정식, 양정로 319-1(용강동), 054)772-6455

◇삼미정=순두부와 돼지수육, 포석정길 4(배동), 054)745-8761

◇호박고을=단호박 오리 훈제구이, 통일로 34-4 (도지동), 054)777-5202

◇부성식당=산채비빔밥 전문, 포석정길 3(배동), 054)745-2258

◇소나무정원=떡갈비 브런치와 커피'과일 샐러드, 포석로 602-7(배동), 054)746-0020

경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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