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사랑하는 님 마주보니 세상 부러울 것 없어라

전북 진안 마이산 담락당과 삼의당의 영정이 있는 명려각(明麗閣)과 부부시비(夫婦詩碑).
전북 진안 마이산 담락당과 삼의당의 영정이 있는 명려각(明麗閣)과 부부시비(夫婦詩碑).

달 같고 꽃 같은 님 삼의당 김씨

하늘엔 달이 가득, 뜰에는 꽃이 가득 滿天明月滿園花(만천명월만원화)

꽃 그림자 엉긴 데다 달그림자 엉긴 곳에 花影相添月影加(화영상첨월영가)

달 같고 꽃 같은 님 마주 보고 앉았으니 如月如花人對坐(여월여화인대좌)

세상의 영욕 따위야 내 알 바가 아니라네 世間榮辱屬誰家(세간영욕속수가)

1769년 10월 13일, 남원 서봉방(棲鳳坊) 마을에서 한 사내아이가 고고(呱呱)의 울음을 터뜨렸다. 조선 초기의 영의정 하연(河演)의 후손인 담락당(湛樂黨) 하립(河氵+昱, 1769~1830)이 바로 그다. 담락당이 고고의 울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같은 마을에서 한 여자 아이도 고고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바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 여성시인인 삼의당(三宜堂) 김씨(1769~1823)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때,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들은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같은 마을에서 어린 날을 보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갑돌이와 갑순이'와는 달리 열여덟 살 때 전격적으로 결혼에 골인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서 어릴 때부터 가정 분위기와 독서를 통하여 유교적 교양이 몸에 배어 있었던 그들은 첫날밤부터 부부의 도리와 충효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부부는 동방(洞房)의 촛불을 끄기 전에 자신들이 지은 한시를 주고받으면서 예사롭지 않은 둘의 인연을 자축하기도 했다. 그들 부부의 신혼 초기에는 그야말로 깨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참기름을 짰다.

어느 날 저녁에 삼의당이 담락당과 함께 동쪽 정원으로 산보를 나갔는데, 짜장 환한 달빛이 아름답고 꽃 그림자가 땅에 가득했다. 그때 남편이 시 한 수를 지어 아내에게 보였다. "한밤중 밝은 달에, 한 봄철 곱게 핀 꽃(三更明月仲春花:삼경명월중춘화)/ 정말 고운 꽃에 환한 달이 어려(花正華時月色加: 화정화시월색가)/ 달 따라 꽃을 보는데 님이 또 이르시니(隨月看花人又至:수월간화인우지)/ 둘도 없는 좋은 경치 우리 집에 펼쳐지네(無雙光景在吾家:무쌍광경재오가)" 달과 꽃을 배경으로 한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몽환적이다. 이토록 멋진 시를 본 아내가 흥에 겨운 나머지 남편 시의 운(韻)을 따라서 맞장구를 쳤다. 그것이 바로 위에 소개한 시다. 달그림자 꽃 그림자 서로 엉긴 곳에, 달 같은 님 꽃 같은 님과 마주 보고 앉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따라서 이 세상의 부귀영화 따위에는 아예 관심 자체가 없다.

내일은 5월 21일, 이른 바 '둘이 하나 된다'는 부부의 날! 이 넓은 천지간에 딱 한 사람뿐인 그 사람을 만나 위와 같은 시를 주고받으며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격한 부부싸움조차도 상대방이 지은 시의 운을 따라 시를 지어 주고받으면서 품위와 격조 높게 할 수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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