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26>-엄창석

무엇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인지.

갑자기 들이닥친 서석림 앞에서 계승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쉰여덟 살의 남자는 등이 조금도 굽지 않은 꼿꼿한 풍채를 띠고 있었다. 계승은 너울대는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입술이 얇고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와 있었으며, 늘어진 눈꺼풀 아래로 크고 맑은 눈동자에는 초로(初老)에 이르도록 겪은 갖은 풍상에서 그를 살아남게 해준 어떤 투명한 열정이 담겨 있는 듯했다. 장사치들의 심부름꾼으로 시작해서 보부상 상단을 거느린 대상인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낙동강 무역을 손에 넣은 그가 아닌가. 이어 대구로 돌아와 대성당(大聖堂)을 짓고, 교육사업과 금융업, 광대한 수목원 사업에 몰두했다.

격한 시민들 사이에는 그를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일본 통감부가 주도하는 신구(新舊) 화폐 교체 사업에 서석림이 한몫을 맡았다는 것이다. 1905년부터 시행된 화폐 교체로 전황(錢荒)이 일어나서 갑자기 돈을 잃은 사람들이 잇달아 자살했다. 지금껏 그 여파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추풍령을 기준으로 남쪽과 북쪽에서 통용되는 돈이 달라 타지방 사람들이 거래를 할 때 물건보다 돈 가치를 헤아리는 게 더 까다로운 실정이었으니까. 어떻게든 화폐를 통일할 필요가 있었는데 일본 통감부가 그 일을 했다. 경제생활의 효율성과 일본 침략의 길이 될 위험성은 언제나 손바닥과 손등처럼 맞붙어 있었다. 밤중에 찾아온 그를 만난 감격이 한쪽에서 날카롭게 들리는 비난의 소리와 겹쳐져 오히려 더해진 서석림의 위엄에 압도된 탓일까. 계승은 좁은 인쇄실에서 그와 겨우 1미터 떨어져서 한참동안 마주보고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틀 후, 계승은 석림을 배종(陪從)하여 사문진으로 가게 되었다. 삼 년 전, 경부선 철도공사 당시에 갖가지 재료를 나르느라 사문진과 대구 정거장 사이에 깔아놓은 레일이 아직도 드문드문 남아 있는 길을 따라, 서석림은 조랑말을 타고, 계승은 걸어서 사문진으로 향했다. 사문진은 대구 서쪽의 화원에 있는 낙동강 나루였다.

오전 열시쯤에 사문진에 도착했다. 금호강이 합류하는 사문진에는 광활한 늪지대를 끼고 낙동강이 흘렀다. 며칠 간 내릴 눈으로 강가는 햇살을 받아 미광을 길게 내뿜었고 미루나무 왕벗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가지에 쌓인 눈을 털고 있었다. 계승의 집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달배(월배)였다. 어릴 때 나루로 나와 객주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동전을 모았던 기억이 났다. 소달구지를 타고 대구로 간 게 열한 살 때였다. 그 뒤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다시는 달배에 오지 않았다. 사문진에 와 본 게 14년이 되는 셈이었다.

눈앞의 풍광은 기억에 담긴 것과 많이 달랐다. 강안 안쪽, 낮은 산비탈 아래로 납작하게 엎드린 초가들은 그대로였지만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섰던 기와집들은 이제 낡고 흉물스러웠다. 사오십 간이나 되는 그 집들은 죄다 보부상들이 오가는 객주였다. 그때는 이른 아침부터 돛을 높이 쳐든 배들이 나루로 모여들고, 강안 공터에는 대마장, 무계장, 성주장, 대구 큰장으로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는 상인들이 들끓었다. 청나라 전쟁에 나갔던 수백 마리의 일본 말들이 배에서 내릴 적도 있었다. 말들이 대구로 들어가고 그놈들이 떠난 자리에 똥이 산더미처럼 쌓여 한동안 상선에서 하역한 물건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 밤에는 일대가 불야성이었다. 객주 담장에 끝없이 기대놓은 지게들, 시끌벅적한 노래 소리와 고함소리, 어느 집에서 싸움이 붙어 옹기를 마당에 던져 박살내는 소리가 퍽퍽 들렸었다. 겨울이라 한산한가. 하지만 계승의 기억에 있는, 상인들보다 아낙들이 더 자주 들락거렸던 느릅나무 객주집은 기와가 헐러 내리고 담장이 무너져 있었다.

그래도 수십 척 상선들이 강둑에 코를 대고 정박해 있어서 계승은 은근히 반가웠다. 눈이 덮인 탓에 오랫동안 띄우지 않은 것으로 보이긴 했다. 상류인 안동 대창나루까지 거슬러 올랐다가 남해 바다 어귀까지 내려가는 상선들일 거다. 사문진은 낙동강의 중간 지점이었다. 인구가 밀집한 대구와 성주로 물건이 빠져나가거나, 그곳의 물건들이 모여들어 어느 때든 상선이 정박해 있었다.

"시찰 어른, 이제 오십니까?"

강둑 가까이에 있는 길가 집에서 중년 하나가 황망히 뛰쳐나왔다. 솜옷을 두툼하게 껴입은 사공이었다. 10년 전 외획제(外劃制)가 시행될 때 서석림이 경상도 시찰관을 맡은 적이 있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그를 시찰어른이라 불렀다.

"요새 장이 안 서는가?"

서석림은 자신이 한때 전쟁을 치르듯이 견뎌냈던 보부상들의 시황(市況)을 묻지 않고 오일장만 입에 올렸다. 아무리 변해도 오일장은 서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내일이 8일이니까 안언 장날입니다. 삼량에서 솜과 무명이 들어온답니다. 부탁하신 배는 대놓았습니다."

서석림은 미리 사람을 보내 배를 준비하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계승과 서석림은 중년 남자를 따라 선착장으로 내려섰다. 눈이 쌓인 상선들 사이에 말끔히 정돈된 작은 돛배 하나가 물살에 흔들리고 있었다. 뒤에서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아낙이 점심을 드시지 않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중년 남자가 서석림의 눈치를 살피고는 손으로 뱃머리를 잡았다. 서석림이 훌쩍 배에 올랐다.

"떠날 준비 됐으면 노를 잡게. 점심은 개포(고령에 있는 나루)에서 먹을 거네."

계승은 이때까지도 서석림이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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