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줄잇는 폐업, 이번 달 월급이 마지막일지도…"

설움 겪는 영세한 협력업체

6일 오전 8시 대구 달서구 성서산업단지(이하 성서산단). 출근길에서 만난 정모(41) 씨는 다니는 선반제조업체가 일감 부족으로 인한 경영난에 시달리다 폐업 위기에 몰렸다며 발걸음이 무겁다고 했다. 정 씨는 "회사에 가도 직원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번 달 월급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막막하다"고 씁쓸해했다.

대구의 대표적인 산업단지인 성서산단이 휘청거리고 있다. 1984년부터 조성된 성서산단은 지난해 12월 기준 총생산액이 16조4천374억원에 달하는 지역 최대 산단이다. 성서공단을 통해 대구 제조업계 전반이 처한 위기를 들여다봤다.

◆일감 줄어 출혈 경쟁…구인난도 심각

고주파열처리로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성서산단 A사 간부는 요즘 몰려드는 사표에 직원들 마음을 돌리느라 머리가 아프다. A사는 자동차부품 업계 피라미드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3차 협력업체다.

뜨거운 열을 이겨내려 고무장갑을 낀 채 일하고, 공장 직원 대부분이 만성 습진에 시달리는 A사에 최저임금 인상 탓에 직원을 내보낸다는 말은 '딴 나라 얘기'다. 오히려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가 늘어날 것을 기대해 더 나은 환경의 업체로 이직하려는 직원들을 붙잡기 바쁘다.

A사 관계자는 "1년 전만 해도 40명에 육박하던 직원이 지금은 34명까지 줄었다. 인건비 문제로 사람을 내보낸다는 생각도 중견기업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라며 "인원을 안 줄이고 적자폭을 메우려니 200%의 상여금 전체를 기본급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반발한 직원들의 사표가 몰려들고 있는데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

생산한 제품 전량을 성서산단 등 지역 내의 2차 협력업체에 납품하던 A사는 최근 수주 물량이 2년 전의 70% 수준까지 떨어졌다. 자연스레 가동률도 줄었다. 2년 전만 해도 24시간 내내 돌아가던 10대의 고주파 열처리 설비는 현재 8대만 가동하고 있다. 나머지 2대가 가동되는 시간은 유지'관리를 위한 2시간이 전부다. A사 관계자는 "줄어든 수주물량을 놓고 협력업체들 간의 경쟁도 치열하다. 수주를 위해 원가에 가까운 가격에 계약하고 있다"며 "과도한 경쟁이 영세업체들 전부를 폐업으로 몰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3차 협력업체로 겪는 설움도 커지고 있다. 상위 업체는 회사가 어려우면 부담 일부를 하위 협력업체에 지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가장 바닥의 영세업체는 어려움을 고스란히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성서산단은 종사자 수가 50인 미만의 영세업체가 전체의 70%에 달하며 이들 대부분이 하위 협력업체다. A사 관계자는 "같이 경기가 안 좋아도 영세업체와 중견기업이 체감하는 정도는 하늘과 땅 차이"라며 "먹이사슬 가장 아래에 있는 영세 협력업체는 존폐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금속가공업체 B사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 회사는 수주물량이 줄자 지난해 11월쯤 설비 8대 중 2대를 멈춰 세웠다. 인력난에 시달리던 B사는 적자를 감수하고 수천만원을 투자해 지난해 말 자동화 로봇 1기를 도입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자동화 로봇이 설비 1대를 24시간 도맡고 있지만 생산 효율은 사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

30여 명의 직원으로 공장을 2교대로 운영하고 있는 B사 입장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B사 관계자는 가뜩이나 인력난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도저히 3교대를 도입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는 "수주물량이 20% 정도 줄었는데 공장 노동자는 그 이상으로 줄었다"며 "사람이 없어 로봇까지 들여왔는데 3교대를 도입하면 10명 남짓의 인원을 새로 구해야 한다. 사람을 못 구하면 결국 설비를 세워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공장 내놓은 업체 늘어…업종 다변화 필요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경영을 포기하는 사업장도 나타나고 있다. 취재진이 성서산단을 다녀본 결과 공장 부지를 매매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성서산단 인근 한 부동산 업체에 따르면 현재 성서산단에 올라온 공장 매물은 20여 개에 달한다. 계속된 적자를 이기지 못해 폐업을 선언했거나 땅값이 저렴한 달성군'경북 성주군 등 타 지역으로 공장을 옮기고 비워둔 경우도 포함됐다.

한 부동산 중개업체 관계자는 "올 들어 평소보다 매물이 20% 정도 늘었다. 매물이 20개를 넘기는 일은 흔치 않은데 요즘 들어 폐업한 업체가 많다"고 말했다.

업체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주변 상권에도 번지고 있다. 성서산단 인근의 한 식당 주인은 업체들의 회식이 줄며 매출이 급감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식당 주인은 "'작년만큼만 하자'는 건배사를 종종 들을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 산단과 공생하던 인근 자영업자들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제조업계는 성서공단이 당면한 위기의 이유로 자동차부품, 섬유 등 주력업종의 쇠퇴를 꼽았다. 한국산업단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성서산단에 입주한 자동차부품 업체는 1천163개에 이르고 섬유업체가 536개로 뒤를 이었다. 입주업체의 절반 이상이 두 업종에 몰린 셈이다.

장기적으로 성서공단도 기존 업종에서 탈피해 4차 산업혁명에 맞춘 새로운 업종 개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업체가 노력해도 쇠퇴하는 업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결국 다양한 업종이 산단에 들어서야 휘둘리지 않는다"며 "실제로 규모는 작지만 유망한 업종이 많은 성서산단 5단지의 경우 1~4단지에 비해 상황이 낫다. 다양한 업종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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