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소인(小人)

주나라가 호경(鎬京)에 수도를 뒀던 서주(西周) 시대-수도를 낙읍(洛邑)으로 옮긴 이후 진(秦)에게 멸망할 때까지는 동주(東周)라고 한다-말기는 중국 상고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들어 괭이'호미'낫'보습 등 농기구가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었고, 우경(牛耕)과 비료 사용, 이모작 등 새로운 농업기술이 개발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뿐만 아니다.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황무지 개간도 그만큼 용이해져 농지 역시 크게 늘어났다.

이런 변화는 사회 구조에도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바로 빈부 격차의 심화와 그에 따른 부농(富農)의 출현이다. 요즘으로 치면 '졸부'에 해당하는 이들은 축적한 부를 이용해 신분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축적한 잉여가치를 세금으로 내면서 신분 상승을 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예'(禮)로 표현된 주의 신분제적 사회 질서는 교란을 맞았고, 동주 시대에는 그 혼란이 더욱 극심해졌다.

공자는 이런 시대 상황을 개탄해 마지 않았다. 특히 부를 자랑하며 거들먹거리는 졸부들을 매우 혐오했다. 그 표현이 '소인'(小人)이다. 공자가 말한 '소인'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당대의 졸부들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의 구절이다. 군자(君子)와 소인은 원래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적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공자는 이렇게 인성적(人性的) 의미로 바꾼 것이다.('세계철학사 2, 아시아세계의 철학' 이정우)

이는 공자가 이상으로 여겼던 서주의 신분제적 질서가 교란되는 현실 앞에서 얼마나 당혹스러워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졸부를 소인으로 멸시한 공자의 생각은 경청할 필요가 없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봉건주의자의 절망적 복고(復古) 취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당하게 벌고 관대하게 쓴다면 졸부도 얼마든지 존경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바로 어린 시절의 가난이 트라우마가 돼 돈 자체에 집착하는 부자들이다. 110억원대 뇌물수수 및 350억원대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를 받는 이명박 전 대통령도 이런 유형인 듯하다. 부자가 됐음에도 돈에 관해서 만큼은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한 '키덜트'(kidult)라고 하겠다. 공자가 이를 봤으면 뭐라고 할까. 역시 '소인'이라고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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