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4년 전 대낮 도심서 간첩에 살해당했지만 배상도 못받아, 1984년 대구 신암동 무장간첩 침투 사건

법원, 위자료 1천500만원 화해 권고…정부는 "배상 책임 없다" 맞서
"3대에 걸쳐 신음해온 고통은 누가 책임지나요"

1984년 대구 무장간첩 사건 당시 살해됐던 전갑숙 씨의 아들 김병집 씨가 매일신문이 보도한 관련 기사 사본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1984년 대구 무장간첩 사건 당시 살해됐던 전갑숙 씨의 아들 김병집 씨가 매일신문이 보도한 관련 기사 사본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1984년 9월 24일 오후 1시 대구 동구 신암2동 희빈식당. 전갑숙(당시 29세)씨가 운영하는 식당에 2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 침입했다. 이 남성은 권총으로 전 씨와 종업원 강명자(당시 20세)를 살해하고 시민들과 격투를 벌이다 독극물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경찰은 이 남성이 소지한 북한제 무기들을 근거로 '남파 간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대구 신암동 무장간첩 침투 사건'이다.

사건이 벌어진 지 34년이 지났지만, 정당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절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대낮에 도심 한가운데서 무고한 시민이 간첩에게 살해당했지만, 정부는 "배상 책임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대구지법 제13민사부(부장판사 원종찬)는 숨진 전 씨의 아들 김병집(36) 씨가 정부와 대구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위자료 1천500만원을 지급하라는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다.

사건 당시 김 씨는 고작 생후 10개월이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했던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는 김 씨는 "할머니는 내가 부모님을 찾을 때마다 미국으로 일하러 갔다고 했다. 중학생이 돼서 부모님이 미국에 없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고 했다.

김 씨가 이 사건을 알게 된 건 2014년 5월 할머니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장롱 깊숙이 감춰뒀던 작은 가방을 꺼냈다. 가방 안에는 1991년 숨진 전 씨와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신문 기사와 각종 서류들이 들어있었다.

김 씨는 "할머니가 이따금 홀로 숨죽이고 흐느끼시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간첩이 대낮에 총으로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 씨는 국가정보원과 국가기록원 등 정부기관을 다니며 자료를 찾았고, 2015년 9월 유족구조금 지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정부는 사건 발생일로부터 10년인 범죄피해자구조금과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소멸시효가 모두 지나 배상할 수 없다고 버텼다. 국가 과실도 증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8년부터 2010년까지 위로금을 받은 간첩 사건 사망피해자는 모두 385명(4억4천600여만원)에 이른다.

김 씨는 법원의 화해 권고에 이의를 제기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했다. 34년동안 3대에 걸쳐 담아온 고통에 비해 위자료가 턱없이 적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김 씨의 변호인은 정부가 지금까지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은 점과 유사한 간첩 피해 사례를 들어 6억원의 위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김 씨는 "북한 사람들은 극진하게 대접하는 정부가 왜 우리 가족은 외면하는지 모르겠다"며 "청와대 홈페이지에도 국민 청원을 올렸다. 답변을 들을 수 있도록 시민들이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