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지기 1년 전에 찍은 가족사진을 조카에게 꼭 전해주고 싶어요."
제21차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박홍서(88) 씨가 부모님과 9남매가 모여 찍은 가족사진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큰 누나는 증명사진을 덧붙인 빛바랜 사진이었다. 박 씨가 간직하고 있는 15㎝ 두께의 사진첩의 여러 사진 중에서도 모든 가족이 모인 유일한 사진이다.
영주가 고향인 박 씨 가족이 북으로 간 건 대구전매국(담배, 소금, 인삼, 등의 전매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에서 일하던 아버지 고 박승열 씨가 전근을 가게 되면서였다.
아버지는 1938년 황해도 사리원전매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박 씨 가족도 사리원으로 거쳐를 옮겼다. 2년 뒤에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평산군 남천읍으로 이사했다.
박 씨가 가족사진을 보며 북에 두고온 13살 터울의 맏형 고 박문서(1918~1984) 씨를 떠올렸다. 경성치과의학전문대학(현 서울대 치과대)를 졸업한 형은 1943년 평산군 남천읍에 병원을 열었다. 당시 소학교를 다니던 박 씨는 여동생과 함께 아침마다 병원 청소를 도왔다. 그는 "청소를 한답시고 병원에서 뛰놀던 저와 동생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형의 표정이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했다.
형은 이듬해인 1943년 인구 12만 명의 신흥 무역도시로 떠오르던 함경도 원산(현 강원도 원산)으로 떠났다. 이 선택은 형과 가족들을 영원히 갈라놨다.
해방 후 소련군이 북한을 장악하던 1946년, 박 씨 가족은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대구에 터를 잡은 박 씨 가족은 원산에 있던 형 문서 씨에게 "남으로 간다"는 서신을 남겼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박 씨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역설적으로 다시 형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했다"고 했다. "전쟁이 나면서 형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죠. 당시 월남한 형의 동료 의사가 '같이 남으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처자식이 있는 군의관이어서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더군요. 전쟁에 참전하면 형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어요."
만 19세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박 씨는 함경도 일대의 동북부전선에 작전하사관으로 투입됐다. 박 씨가 속한 국군 주력부대는 원산에 상륙해 태백산맥을 따라 흥남으로 북진했다. "원산에 주둔할 때는 혹시나 형과 마주치진 않을까 기대했어요. 형제가 총부리를 겨누는 한이 있더라도 형을 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고대했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민군의 반격으로 원산을 빼앗겼던 1950년 12월, 국군은 퇴로가 막혀 흥남에서 배를 이용해 급박하게 철수해야 했다.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이다.
그해 12월 24일 흥남을 떠나는 마지막 배에 올라탄 박 씨는 "정신없이 밀려드는 피난민 무리 속에서 형을 찾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48년이 흐른 1998년 박 씨는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고, 다시 20년이 흐른 올 해에야 꿈에 그리던 형의 소식을 들었다.
"형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만, 혈육을 남겼다는 희소식을 들었어요." 이제 그는 형이 남긴 혈육인 조카 박찬식(74) 씨와 찬희(69·여)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형이 죽기 전 남긴 말은 있는지, 혹시 전쟁통에 원산에서 저를 봤는지 묻고 싶어요. 돌아가신 부모님이 많이 그리워 했다는 얘기도 전해야죠." 박 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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