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말이 유행한 적 있다. 주문 같은 글귀에 만사 재껴 두고 떠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떠나지 못한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주부로서 가족을 뒷바라지하고 집안일 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기에 열심히 일한 당신에서 스스로 제외시켰다.
고착화된 삶이 산산조각 나는 날이 있었다. 허우적대는 나에게 미국 버지니아에 사는 친구 미진이가 손을 내밀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나는 민감하게 반응했던 타인의 시선과 낡은 관습에서 한 발 벗어나 열정의 씨줄과 냉정의 날줄로 삶을 엮어 나갔다.
휴가철이다. 사람들이 뼛속까지 녹일 듯 강렬한 태양을 피해 집을 나선다. 나는 느슨해지고 있는 삶을 팽팽하게 되감을 듯, 쌩쌩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의 여행 에세이 『봉주르 뉴욕』을 펼쳤다. 추억을 되새기며, 설렘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앉아서 하는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날카롭고 감미롭게 다룬 감상적인 소설을 주로 쓴 프랑스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작품으로는 19세 때 『슬픔이여 안녕』 1954년에 발표를 시작으로 『어떤 미소』, 『한 달 뒤, 한 해 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이 있다.
『봉주르 뉴욕』에서 사강은 뉴욕, 이탈리아, 쿠바, 예루살렘을 여행한 느낌을 섬세하고 냉소적으로 자연과 고향, 애마를 열정적이고 고독하게 그린다. 그녀의 일기장 같은 책은 궁금했던 인간 사강의 민낯뿐만 아니라 속살까지 엿볼 수 있었다.
“뉴욕은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탐욕스럽고 긴장된 도시다. 도시 어디에도 한가롭게 빈둥거리는 사람은 없다. 뉴욕에서는 숭배하는 신들이 있는데, 낮의 신은 질서와 군집 본능과 돈과 미래이며, 밤의 신 역시 돈과 술, 그리고 고독이다.(14쪽)”
이십대에 사람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그녀가 놀랍기만 하다. 1955년, 뉴욕을 여행한 이듬해 그녀가 쓴 글이라는데, 2016년 가을에 내가 본 뉴욕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뉴욕을 여행할 때와 달라진 것은 아마,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작아졌다는 것. 뉴욕 거리마다 아시아 이방인들이 눈에 띄게 많다는 것. 무너졌던 세계무역센타에 추모기념관이 세워졌다는 것…
“카프리를 떠나기가 너무, 너무, 싫다. 멀어져 가는 카프리 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아름다운 바다와 이보다 더 달콤한 세상을 두 번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바다가 끝나는 저곳에서 만나게 될 모든 것들이 너무 두려워지는 것이다.(34쪽)” 누구나 떠나고 싶지 않은 여행지를 떠날 때 이런 마음이리라. 여행은 상상 만해도 설레고 즐겁다. 기회만 되면 떠나야 한다. 마음먹고 떠난 여행이 실망스러워도 즐기자! 낯선 곳 낯선 사람들의 삶이 내 자리가 꽃자리였음을 일깨워 줄 것이다. 주위 여건상 여행은 꿈도 못 꾼다고 슬퍼하지 말자! 자존감만 떨어진다. 열대야로 잠 못 드는 밤, 시원한 차 한 잔 마시며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거다. 작가의 눈을 따라 상상하며 혼자 떠나는 여행은 더 없이 자유롭고 편안할 것이다.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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