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쏟아지는 8월 어느날 대구 구수산 도서관에서 낯설지만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최근 두 번째 책이자 첫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펴낸 박준 시인이었다.
활자에 무심하고 시에 무지했던 그가 시를 사랑하는 시인이 되기까지 어떤 우연과 인연이 그를 시인으로 살게 했을까. 숱한 질문과 궁금증을 안은 채 강연을 앞둔 그를 만났다.

▷한 인터뷰에서 지역주민과 만나는 시간은 '우연'으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구 구수산 도서관 주민과의 만남은 어떤 우연으로 시작되었나요?
-솔직하게 오늘 만남은 우연보다는 도서관 담당자의 오랜 기획과 계획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 중에 작용한 우연이 있다면 전화 한 통을 받은 그 찰나라 할 수 있죠. 지역 번호 053으로 전화가 왔는데 직감적으로 알았죠. '아, 나를 찾는 전화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타 지역번호나 모르는 번호는 잘 안 받기 마련인데 박준 씨는 잘 받는 편인가요?
-사실 다 받습니다. (웃음) 오히려 서울과 경기권 전화보다. 그 외 지역 전화를 더 열심히, 공손하게 받아요. 오늘처럼 저를 필요로 하는 전화일 가능성이 높거든요. 서울에는 저 말고도 유명한 시인이나 작가가 많음을 알기에 일정이 안 맞으면 거절할 때도 종종 있지만 지역은 그렇지 않아요. 꼭 박준이어야만 하기에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일상에서도 가까이 있는 사람은 쉽게 부르지만 멀리 있는 사람은 정말 꼭 필요해서 부르고 또 신중하게 부르잖아요? 불러주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먼 지역, 작은 공간일지라도 꼭 가려고 노력해요. 새로운 만남이란 설렘이 있어서 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일정을 준비한답니다.
▷20살 때부터 신춘문예에 도전하셨더라고요. 문학을 등한시하는 요즘 '시인'이라는 직업을 택하기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어려웠을 텐데요. 어떻게 시인을 꿈꾸셨나요?
-원래 글자를 싫어했어요. 약을 사면 복용설명서는 읽지도 않고 버릴 만큼 싫어했죠. 20살 대학교 입학해서 한 동아리에 들었어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동아리 분위기가 꼭 나를 보는 거 같았어요. 알고 보니 그 동아리가 시 읽는 동아리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시를 읽었어요. 본격적으로 읽은 첫 시집이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이었죠.
큰 충격이었어요. '시가 원래 이렇게 어려웠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동시에 '나도 한 번 써봐?' 하는 자만심도 생겼고요. 정보와 지식이 아닌, 정서를 다루는 장르라는데 매력을 느꼈고 점점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시인이 된 거죠.

▷황석영 소설가는 글은 엉덩이로 쓰는 일이라 하고, 이외수 작가는 철창에 본인을 가둬놓고 글을 다 쓸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고요. 박준 씨 작업 방식도 궁금합니다.
시는 물리적 시간을 요하는 소설과는 조금 달라요. 시를 써야지 결심하면 4~5일 정도는 휴대폰을 놔두고 훌쩍 떠나요. 다른 지역이나 시골로요. 그곳에서 덧없는 활동을 많이 해요. 손톱도 다듬고 평소라면 보지도 않았을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챙겨보고요. 책상에 앉아 시를 써나가기 전 시인으로서의 정서를 채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시 한 편을 완성하는데 10%는 책상에서 이루어진다면 90%는 거리에서 쓴다고 생각해요. 거리 풍경을 마음에 넣어두고 눈에 담아둔 뒤 책상에 앉아 백지를 만나면 꺼내서 쓰는 거죠.
▷박준 씨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출판사 편집자이기도 한데요. 시인과 직장인, 두 가지 색깔이 분명 다를 듯합니다. 어떻게 다른가요?
예민함과 감수성, 그 정도가 달라요. 일례가 있어요. 하루는 친구들과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 갔어요. 오징어 통찜을 시켰죠. 얼마 뒤 요리가 나왔는데 오징어 뱃속에 정어리가 한 마리 들어있더라고요. 출판사 직원인 '박준'이었다면 정어리를 걷어내고 그냥 오징어 통 찜을 먹었을 텐데 그날은 마침 시인 버튼이 켜져 있었어요. 어떻게 했냐고요? 문학인 친구들과 함께 정어리를 화장지로 감싸고 집에 오는 길에 고이 묻어주었어요. 차이가 극명하죠.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빌려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독자가 대개 20대~40대 여성이더라고요. 독자층이 뚜렷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마 보편성이지 않을까요. 특별하지 않고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함이요.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끄덕여주는 것 같아요. 책 속 이야기를 당신의 삶이 아니라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많은 사람의 평범한 경험을 제가 대표로 종이에 써내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 생각해요. 읽는 분도 그렇게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지 않을까요?

▷기계와 자동화 등 실용과 편의에 기대다 보니 문학과 사람 자체에 대한 고민은 줄어드는 분위기입니다. 2018년 현재 박준 시인이 바라보는 문학의 역할과 가치가 있다면요?
-"좋은 시란, 나로 시작해서 우리를 거쳐 개인의 고통을 객관화하고 타인과 섞는다." 문학 평론가 고(故)김현 씨가 했던 말입니다. 이 문장으로 질문의 대답을 갈음할 수 있겠네요.
조금 덧붙이자면 타인에게 공감하고 '당신, 지금도 괜찮다' 토닥여주는 손길이 곧 문학이기도 하고요. 전자책이 상용화한 지 10년 째지만 서점과 출판계에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율은 사실 아주 미미해요. 이 현상이 곧 문학의 가치를 방증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책을 손에 쥐고 종이를 넘길 때 건네받는 위로와 감동은 편리와 실용이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인 건 확실한 듯합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눈물 흘리듯, 시를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시를 읽는다.
우린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걸까. 눈물을 흘리며 아픔을 씻어내고 시를 읊으며 상처를 위로하기에 눈물과 시는 다르지 않음을."
좁은 골목을 천천히 걸어야만 길모퉁이에 고개 숙인 꽃을 발견할 수 있다. 박준 시인은 그 꽃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느긋함과 섬세함, 그에 더해 작은 것에도 손을 내밀 줄 아는 따듯함이 있는 사람. 오늘 만난 박준 시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매일신문 디지털 시민기자 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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