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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부] 태풍 유감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태풍에 이름이 생긴 것은 1950년대였다. 처음에는 예보관들이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이나 좋아하는 여자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1999년까지는 괌에 위치한 미국 태풍합동경보센터에서 정한 이름을 사용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름은 아시아 각국이 정한 고유한 이름들이다.

20세기 들어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초래했던 태풍은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에 한반도를 휩쓴 것이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루어낸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서 불어닥친 이 이름 없는 태풍으로 무려 1천200명이 넘는 목숨이 쓸려 갔다.

가장 큰 재산 피해를 낸 태풍은 월드컵 축구 4강 신화로 온 나라가 후끈 달아올랐던 2002년 여름에 이 땅을 강타한 태풍 '루사'였다. 5조원이 넘는 피해에 이재민이 8만8천 명에 이르렀다. '루사'는 일일 최고 강수량 기록도 세웠다. 강릉 지역에 하루 870㎜가 넘는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내년에 회갑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태어난 해인 1959년 추석 명절에 상륙한 태풍 '사라'는 특히 경상도 지역을 초토화했다. 6·25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허약한 산하와 인정을 할퀴고 간 '사라'는 전쟁만큼이나 무서운 재앙이었다. 태풍 '루사'가 지나간 이듬해 9월에 발생한 '매미' 또한 강한 비바람을 몰고 와 상당한 재앙을 남기고 간 역대급 태풍이었다.

'매미' 이후로는 이렇다 할 초강력 태풍은 없었다. 아예 태풍다운 비바람을 맞아 보지도 못한 채 깡마른 여름을 보낸 해도 많았다. 올여름은 특히 폭염과 가뭄 때문에 태풍에 대한 걱정보다는 기대가 많았다. 역대급이라는 '솔릭'에 귀가 솔깃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태풍이 허풍이 되고 말았다.

태풍은 자연계에든 인간사에든 없어서는 안 될 '필요악'이다. 다만 제 역할을 못 하거나 지나친 게 낭패인 것이다. 때를 맞춰서 오는 비를 시우(時雨)라고 한다. 사람도 필요할 때 찾아와야 반가운 법이다.

정작 태풍이 지나가고서야 비가 내리고 있다. 가을에 강한 태풍 하나가 더 있다니, 이젠 그게 불청객이 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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