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예비역 하사 이규락의 6.25전쟁 참전기(參戰記)이다. 필자에게 수차례 들려준 이야기를 종합하여 「노병의 증언」이란 제목을 붙이고 글을 완성해서 그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연락이 끊겼다. 6.25전쟁 발발 65년 만에 '판문점선언'으로 종전이 눈앞에 온듯하다. 전쟁의 참상이 어떠했는지 이 시점에 알리고 싶다.
◆군 입대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경주공업중학교 3학년 때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앙학련회 간부들이 내려와 학련회 중심으로 학도병 입영을 독려했다. 나는 학급장이었고 그 땐 학생들도 좌우로 갈라져 갈등을 빚을 때였다. 내가 학도병을 지원하지 않고 징집명령에 따라 입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서 학도병으로 입영한 경주지역 학생들이 안강전투에 참전하여 참패를 당했다. 군인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시상황이 워낙 다급한 나머지 사격연습 몇 번 시켜서 안강전투에 투입시켰던 것이다.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들이 안강전투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50년 8월 28일. 나는 할머니를 비롯한 부모형제, 그리고 신혼의 아내와 헤어져 집결지인 경주향교로 갔다. 경주향교강당에는 경주중학생과 경주공업중학생, 경주문화중학생 등, 수십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얼핏 보면 학도병들의 출정식 같았다. 이때 징집에 응해서 작별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사지로 가는 마지막 인사나 다름없었다. 그러기에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 모두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 산을 바라만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먹밥 한 덩이씩 받아먹고 트럭에 분승하여 대구로 갔다. 초행길인 대구는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서 마치 전쟁터로 가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결지가 대구남산초등학교였다. 대부분 학생들이었는데, 모인 숫자가 수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점호를 마친 후에 분산 배치되었다. 경주에서 징집되어 온 우리들은 동인로터리 부근에 있는 제사공장(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가다구라'제사공장)에 수용되었다. 그곳이 임시 훈련소였다. 군대 조직을 편성하고 내무반도 배치 받았다. 교복에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보니 군인이 다된 기분이었다. 내무반에서 내무규율이나 근무요령 등 기초교육만 받고 밤 10시경 소등과 동시에 취침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기 때문이다. 전투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어느 전선에 배치될 것인지 두려움뿐이었다. 안강전투에서 맥없이 죽어간 학도병들처럼 나도 어느 산천에 묻힐지 모르는 불안감이 잠을 설치게 했다. 앞서 학도병으로 입대한 선배들의 많은 희생을 본 터라 내가 적군과 대치상황에서 총을 겨눠 적을 사살하고 내 목숨을 지켜낼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생각보다 밤은 길었다.
◆영천전투
50년 8월 29일. 아침 5시에 나는 기상나팔소리를 들었다. 한 번도 긴장상태에서 살아보지 않은 나는 흥분이 되어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신체검사를 받고 하루를 보냈다. 그 다음 날은 왼 종일 제식훈련만 받았다. 9월 1일이 되어서야 봉덕동에 있던 국방군 6연대 사격장에서 M1소총과 실탄을 지급 받고 3일 동안 사격훈련을 받았다.
50년 9월 4일. 한 밤중에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부대는 대구역에서 기차를 탔다. 밤중에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기차선로를 확인해보았다. 복선이 아닌 걸로 봐서 경주방향으로 간다고 지레짐작했다. 하양역에서 내려 어느 과수원창고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아침밥을 먹었다.
50년 9월 5일. 하양에서 금호 소재지를 지나 일본군이 경비행기 저장방카로 사용하던 격납고에 분산 배치되었다. 하루 종일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틀간 꼼짝하지 않고 대기하면서 출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 너머 영천 쪽에서는 포탄 터지는 소리와 총성이 요란했다. 비가 오는 밤하늘엔 전폭기가 떠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50년 9월 6일 새벽. 8사단 16연대는 영천시가지 탈환작전에 돌입했다. 시가지는 모두 피난을 떠난 뒤여서 인기척 없이 주인 잃은 개들만 총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우리는 첫 전투로 소규모의 적을 만나 접전 끝에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시내 곳곳에 인민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부상자들은 여기저기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저항하던 인민군 잔병들은 보현산 방향으로 물러갔다. 영천 시내를 탈환한 여세를 몰아 고경초등학교 뒷산에 집결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11월20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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