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로 편하고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비용지급 외에도 생면부지의 타인과 한 공간을 공유하면서 외부로부터 고립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택시 안에서 누군가 말을 걸면 원치 않아도 대화에 끼어야 한다.
60대 택시 기사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성 폭언에 시달릴 때도 여대생 A(23) 씨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A씨가 간신히 남긴 녹음은 택시에서 내린 그가 차량번호를 속삭이는 것으로 끝이 난다. 행여 기사가 백미러로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해코지라도 할까 봐 벌벌 떨 만큼 두려웠기 때문이다. 녹음 내용은 2분이 채 안 되지만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상스러운 표현이어서 도저히 한 번에 다 들을 수 없었다.
A씨의 가족들은 이를 경찰에 알렸지만 "신체접촉 없이는 형사처벌이 어렵다"는 말에 다시 절망에 빠져야 했다. A씨의 아버지는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한탄했다.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조치라고는 고작 행정기관에 민원신고를 하는 것뿐이었다.
취재 당시는 사건이 발생한 지 1주일도 넘었지만, 대구 남구청에서는 '민원을 모아서 다 같이 처리해야 하니 접수확인만 했다'고 답변했다. 피해자가 길가에 지나가는 택시만 봐도 벌벌 떨 만큼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던 그 1주일이다. 막대한 정신적 피해에 행정기관 처분은 고작 과태료나 경고에서 그친다.
그가 속해있던 택시회사 관계자는 "기사가 평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지만 성 폭언을 할 사람은 아니다"고 두둔하면서 "요즘 '타다' 때문에 업계가 흉흉한데 이 일로 악영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문제의 택시기사가 불과 한 달여 전에 A씨와 같은 20대 여성 승객에 성 폭언을 늘어놓아 물의를 일으켰다는 것을 업체 측이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택시업계에 미칠 영향만 먼저 걱정했다.
결국 사건이 불거지며 회사를 그만둔 택시 기사는 3년 무사고 기록을 갖고 있다. 현재로선 다른 회사에 재취업하거나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해 언제든 다시 운전대를 잡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평범했던 일상이 택시 문을 넘어선 순간 한순간에 일그러져버렸음에도 피해자는 어느 곳에도 하소연할 수 없이 연거푸 좌절해야 했다. 매일신문 기사에는 "나도 택시를 탔다 비슷한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들의 댓글과 "이런 피해를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하루 빨리 관련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다음 달부터 대구에서는 여성전용 택시가 도로를 달린다. 여성이 안심할 수 있는 택시를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도, 그마저도 5대뿐이라는 것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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