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운동장에 열을 맞춰 서 있는 동안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이 이어졌다.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그건 참 지루한 일이다. 머리는 멍해지고, 나는 유체이탈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시간을 가로질러 어느새 운동장은 졸업식장으로 바뀌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3년 후의 졸업식장에 서 있고, 입학식을 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거다!
살아가며 가끔 겪는 일이지만, 이렇게 시간이란 주제는 나에게 신비로운 사고실험을 하게 한다. 비선형적 시간, 즉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인과 관계를 벗어난, '오래된 미래' 같은 통합된 시간개념 말이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SF소설을 보면 이런 비선형적 시간개념이 등장한다. '컨택트'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외계인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오징어처럼 생긴 외계인 '헵타 포드'는 먹물을 뿜어 둥근 원형의 문자를 발화한다.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이 문장은 시작과 끝이 없는 표의 문자이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사피어 워프', 즉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론처럼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삶의 시간을 바라보게 된다. 마침내 주인공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딸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미래를 본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런 정해진 미래를 살아내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유한함을 알지만 자신의 운명을 살아간다. 아모르 파티,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 운명처럼 그림을 시작했고, 별 볼 일 없는 작가로 끝장을 볼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길을 걷고 있다.
마찬가지로 컨택트의 주인공도 그렇게 자신의 곁을 떠날 딸을 만나기로 한다. 그것은 마치 자유의지가 없는 유전자 운반체로서의 인간의 숙명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운명을 긍정한다. 왜? 그녀가 고통스러운 미래를 알면서도 딸을 낳는 이유는 사랑으로 가득한 그 과정의 찬란함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쉽지 않은 작가의 미래를 뻔히 알면서도 걸어가는 이유는 창작의 과정, 그 찬란함을 알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해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이라는 개념으로서의 새해이다. 즉 우리의 사고가 구조화한 과거, 현재, 미래의 직선적 흐름이다. 그러나 그믐을 지나 설날이 되는 순간을 누구나 겪어보았듯 그곳에 옮아가는 새로운 경계는 없다.
인간이 발명한 달력과 시계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우리는 캄캄한 밤, 등불을 들고 길을 걷는 사람처럼 현재라는 영원한 원의 중심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의 미래이자 내일의 과거인 오늘은 헵타 포드의 문자처럼 끝과 시작이 없는 원으로서의 현재이다.
코로나19로 힘든 새해지만 우리는 모두 차가운 눈 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또 한 해를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끝을 알면서도 빛처럼 명멸하는 삶은 반짝이는 호수의 표면처럼, 또는 찬란한 불꽃놀이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리우 영상설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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