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작은 농촌마을인 개령면에 20세기 초반 김천지역에서 두 번째로 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빗내(광천) 들판을 중심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개령 주민들의 노력이 존재한다.
농업이 기반산업이었던 20세기 초 개령은 감천의 풍부한 수량과 넓은 빗내들에서 생산되는 쌀로 인해 경제력이 커지자 많은 인구가 모여들어 당시 개령군(현 김천시 개령면)의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했다.
개령향교를 통해 한학을 배우고 있었지만 신식 교육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개령주민들은 충분한 재력을 바탕으로 신식 학교의 설립에 나섰다.
김천시 개령초등학교는 다른 학교들과 달리 학교 설립과 관련된 명확한 문건이 존재한다. 개교부터 1945년 광복 전까지 학교의 역사를 기록한 '개령공립보통학교 연혁사'에는 1908년 1월 김천시 개령면 유지들이 모여 사립 개진학교(開進學校) 창설을 기획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듬해인 1909년 4월 9일 인가를 받아 옛 향약소(鄕約所·향교)에 개교했다. 사립 개진학교 졸업생은 1회 10명, 2회 5명, 3회 16명 등 모두 31명이다.
개령면 주민들이 세운 사립 개진학교는 3회 졸업생을 끝으로 일제에 의해 1912년 4월 1일부터 개령보통학교로 변경돼 2학급을 편성, 4년제로 다시 개교했다.
이후 1937년 '개령공립심상소학교'로 개명했다가 다시 1941년 '개령공립국민학교, 1996년 '개령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꿔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 2월 제109회 졸업식까지 모두 6천355명이 졸업했다.
개령초등학교는 1944년 학생수가 714명에 달하는 큰 학교였다. 1946년에는 '개령서부국민학교'가 신설돼 학구가 분리됐다. 지금은 2022년 재학생 수가 54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로 규모가 크게 줄었다. 재학생 중 상당수는 인근 김천혁신도시에서 전입해 온 학생들이다.
개령초등학교는 외형적으로 농촌의 작은 학교지만 '빗내농악'을 전승해오며 학교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삼한시대 감문국이 위치했던 개령면에는 감문국의 '나랏제사'와 풍년을 기원하는 '빗신제'가 혼합된 '빗내농악'이 전승돼 왔다. '싸움굿, 진굿으로도 불리는 '빗내농악'은 1984년 12월 29일 경상북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2019년엔 국가무형문화재로 승격됐다.
개령초는 지난 2000년부터 지역에 전승되고 있던 '빗내농악'을 교육프로그램에 활용키로 결정하고 7대 한기식(개령초 4회 졸업) 상쇠를 통해 박정철 강사를 소개받아 2001년 '개령초등풍물단'을 창단했다.
개령초등풍물단의 활약상은 대단하다. 최근에만 해도 2019년 구미전국농악경영대회 대상 수상, 2021년 벼고을 국악제 전국전통국악경연대회 최우수상 등 전국 단위 풍물경연대회 수상 경력만 수십 회에 달한다.
최근 개령초등학교는 '빗내농악'을 통해 일본 교포들이 건립한 '건국학교'와 우리나라의 전통인 농악을 매개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 오사카시에 위치한 일본 백두학원 건국학교와 국제교류 활동은 코로나19로 인해 단절 위기를 맞았으나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해 서로 농악 공연을 주고받았고, 올해는 직접 일본을 방문해 다시 교류의 물꼬를 이었다.
장준호 개령초교 교장은 "옛 삼한시대 감문국에서 전해온 빗내농악을 전승하고 있는 개령초등학교 학생들이 일본 백두학원 건국학교와 함께하는 국제교류 활동은 세계 시민 역량 함양 및 한국 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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