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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철학이야기] 어른의 철학, 아이의 철학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나이만 먹었다고 다 어른인 것은 아니다. '어른 아이'도 있다. 철없는 어른 말이다. 반대로 나이가 어리다고 다 아이인 것은 아니다. 어리지만 철이 들 대로 든 '아이 어른'도 있다. 어른이란 무엇인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일에 책임을 지며,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힘이 생긴 사람이다. 한 마디로 철 든 사람이며, 철부지 아이와 대비된다.

사회적 맥락에서 어른과 아이를 논하는 기준은 도덕과 지성의 성숙도이다. 한 시대나 사회가 인정하고 대접하는 큰 어른이 그 좋은 예이다. 예컨대 불교의 '응공(應供)'이 그렇다. 응공이란 부처가 가진 열 가지의 탁월한 능력 가운데 한 호칭이다. 범어 아르하트(Arhat. 아라한)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응당 언제 어디서든 세상 사람들로부터 공양(供養)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어른을 말한다.

세상에서 존경받을 만한 분이니, '님'이란 뜻의 '존(尊)'을 붙여 세존이라고 부른다. 두 발 가진 인간 중에서 최고로 존경받을 만한 분이라서 양족존(兩足尊)으로도 부른다. 남을 위해 맨발로 걸어 다니다가 맨발로 떠난 분. 석가세존의 그 발 앞에 사람들은 머리를 낮춰 절을 한다.

그리고 공자를 높여서 '공부자(孔夫子)'라 할 경우의 '부자'도 그렇다. '부자'는 히브리어의 랍비(rabbi)처럼 보통 덕행이 높아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뜻한다. 공자를 높여 '공씨 어르신, 선생님'으로 부른 공부자는 중국어로 콩푸즈(Kong-fuzi) 영어로 콘퓨셔스(Confucius)로 적는다. 콘퓨셔스는 중국어 발음 콩푸즈를 라틴어로 번역한 '콘푸키우스(Confucius)'에서 유래했다.

예전에 안동에서 '선생'이라 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퇴계'를 가리켰다 한다. 퇴계가 바로 그 시대의 본보기가 될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말썽깨나 부리는 자들도 퇴계가 안동에 기거할 때면 조심하고 조용히 지냈다 한다. 과거엔 사람 사이에 분란이 있을 때 어른의 한마디나 식견이 해결과 조정의 역할을 했다.

◆도덕과 지성이 어른과 아이 구분

사람됨이나 인격이 통하던 '덕(德)'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지금은 덕보다 법의 판단과 심판이 먼저다. 어른의 덕담, 원로의 한 말씀 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더구나 인구 소멸 시대를 맞아, 어른보다도 아이가 중심이 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아이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아이가 먼저이고, 어른은 그 뒷바라지에 급급하다. 과거와는 다른 환경이다. 주자학의 시대에 '어린' 아이는 '어둡고' '어리석은' 존재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어린-어두운-어리석은(蒙) 자'를 '일깨우고, 두드리고, 가르치고, 바로잡는 것'이 그때의 소명이고 철학이었다. 계몽(啓蒙), 격몽(擊蒙), 훈몽(訓蒙), 정몽(正蒙)이란 말에서, 아이들의 머리맡에 놓인 어른들의 회초리가 어른댄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만이 갖는 탁월한 점, 모자라는 점이 다 있다. 그래서 아이는 어른들과 다른 철없고, 천진난만한 세계를 그려낸다. 예컨대 『논어』에 보면 공자가, 어른 자리에 함부로 앉고 손윗사람과 나란히 걸어 다니는 한 아이의 철없음을 눈썰미 있게 지적한 대목이 있다. 아이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예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증자가 병이 들어 임종 직전일 때였다. 촛불을 잡고 구석에 앉아 있던 한 아이가 증자가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멋진 대자리[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내뱉는다. 주위에서 그런 말을 막으려 하자 증자는 "자네들은 이 아이보다도 못하다"며 나무라고는 아들 증원(曾元)을 시켜 깔고 있던 대자리를 다른 것으로 바꾸게 한다. 그 뒤 그는 다시 누우려다 죽는다.

그렇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여 어른보다 솔직하다. 연암 박지원이 유한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천자문』을 배우던 아이가 "저 하늘을 보면 푸르기 짝이 없는데, 하늘 천(天)이란 글자는 푸르지 않아 읽기 싫어요."라며 찡찡거리는 대목이 있다. 느낀 대로 발설하는 동심의 세계가 도드라진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그래서 『장자』에는 어린아이를 "속마음이 곧아 하늘과 동료가 될 존재"로 보고 있다. 이보다 앞서서 『노자』에는, 갓난아이가 대지의 기운 그 자체라서 "독충도 맹수도 손대지 못한다"고 했다. 천지자연의 해맑은 기운을 듬뿍 지닌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 유연한 근골에서 인간 문명의 역사가 잃어버린 근원적 자연을 발견한다. 이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 문명이 다시 읽어내야 할 희망에 대한 것이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아이에게는 한 인간이 어른이 되기까지 망각하거나 상실해버린 많은 잠재성과 유연성, 자연과 순수, 생명의 신비로운 불꽃이 들어 있다. 물론 어른 속에도 그런 아이의 흔적이 숨어 있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맹자는 "큰 사람(大人)이란 갓난아이(赤子之心)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는 했다. 결과를 바라지 않고, 거짓 없고 의롭게 행동하는 큰 사람의 모습은 바로 동심(童心)이 성숙한 형태라는 말이다.

명나라 말기 진보적 양명학자 이지(李贄)는 '동심설(童心說)'에서 동심의 가치를 강조한다. "동심이란 진심이다. 만약 동심이 옳지 않다고 한다면 진심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 된다." "동심이란 거짓을 끊어버린 순수하고 참된 것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최초로 지니게 된 일념의 본심이다." "만약 동심을 잃는다면 진심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

공부를 논할 경우, 불교는 '부모에게서 아직 태어나기 전부터', 도교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을 때부터', 유교는 '태어나 어린아이가 되고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기점은 다 다르나 사람은 '공부해야 할 존재'라는 데 합의한다.

지금의 정치는 언어와 정신이 거짓으로 찌들어 있다. 오염된 어른들이 '동심'으로 눈 돌리고, 맑은 영혼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 진리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 지위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53명의 온갖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하는 『화엄경』의 선재동자처럼, 맑은 눈이라야 세상의 무너진 길을 찾을 수 있다. 규범이 아니라 덕을 회복하는 것이 어른의 길이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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