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인영의 풍수이야기] <19> 경주시 내남면 이조마을 최부자 집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
종가 충의당은 부자 나오는 핵심 자리
현조 정무공 최진립 순절 후 얻은 토지가 富의 시작
조모 영양최씨 묘소, 재벌 역량 가진 천하의 대명당

경주 내남면 이조마을 충의당 대문.부자(富者)가 나올 수 있는 지형으로 그 핵심 자리가 충의당이다. 종택은 자좌 오향(子坐午向)으로 손(巽) 방위에 대문을 두니 풍수 이론에 부합하게 지은 집이다.
경주 내남면 이조마을 충의당 대문.부자(富者)가 나올 수 있는 지형으로 그 핵심 자리가 충의당이다. 종택은 자좌 오향(子坐午向)으로 손(巽) 방위에 대문을 두니 풍수 이론에 부합하게 지은 집이다.

계묘년(癸卯年) 마지막 달이다. 겨울답지 않게 너무나 포근하다가 맹추위가 몰려오는 등 날씨가 널뛰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대표적 문중을 들라 하면 '경주 최 부잣집'을 꼽는다. 흔히들 부자는 3대 가기가 어렵다는데, 이 집은 12대 300여 년간 연간 쌀 만석을 거두어들이는 만석꾼 부자로 산 것이다. 풍수학적인 측면에서 만석꾼 부자로 산 비결을 알아본다.

충의당 안채
충의당 안채

◆부자가 나올 수 있는 핵심자리,충의당

경주 최 부자 12대 중 1대는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1568~1636)이다. 그는 신라시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17세 후손이며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6세 후손으로 1568년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崔臣輔)와 평해 황씨(平海黃氏) 사이에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살 때 외가인 경주부 부남면 이조리(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로 이주한다. 최씨 종가인 이집에서 1700년경 최부자 7대인 최언경(崔彦璥)이 경주 교동(校洞)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교동에서의 마지막 부자 문파(汶坡) 최준(崔浚·1884~1970)은 일제 강점기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신념으로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활동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해방 후 민족 교육에 전 재산을 바쳤다.

정무공 동상
정무공 동상

종가는 본래 당호가 흠흠당(欽欽堂)이었는데, 1760년 무렵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충의당(忠義堂)으로 바꾸었다. 이곳은 넓은 들판에 있어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는 아니다. 경주의 많은 왕릉들이 평지에 있는 것과 같이 평지 명당이다. 풍수에서 물은 재물로 친다. 형산강(兄山江)과 이조천(伊助川)이 합수되는 안쪽에 마을이 있다.

부자(富者)가 나올 수 있는 지형으로 그 핵심 자리가 충의당이다. 종택은 자좌 오향(子坐午向)으로 손(巽) 방위에 대문을 두니 풍수 이론에 부합하게 지은 집이다. 이 터와 더불어 교동의 집터도 명당으로 부를 이어오는데 일정 부분 기여를 했을 것이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부도 유지할 수 없다

최진립은 1594년 갑오년(甲午年)에 무과에 합격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병자호란 때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인조(仁祖)를 호위하러 가는 도중 용인 험천 전투에서 청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했다. 장군의 묘소는 나라에서 장지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르고 병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고 고향에 정려비각을 세워 충절을 만대에 전하도록 하였다.

활인당은 사람을 살리는 집이란 뜻이다. 경주 최부자집의 가르침 중에 사방 백리 내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 있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손자이자 경주 최부자의 3대조인 최국선이 흉년을 당해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휼하고자 이조리 어귀에 초가집을 세우고 그곳에서 쌀을 나눠주고, 또 죽을 쑤었다고 한다.
활인당은 사람을 살리는 집이란 뜻이다. 경주 최부자집의 가르침 중에 사방 백리 내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 있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손자이자 경주 최부자의 3대조인 최국선이 흉년을 당해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휼하고자 이조리 어귀에 초가집을 세우고 그곳에서 쌀을 나눠주고, 또 죽을 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무공을 최부자 현조로 삼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이고 순절한 공로로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를 하사받은 덕분이라 추측된다. 그 부(富)를 상속 받은 2대 최부자 아들 최동량(崔東亮)은 당시 전쟁으로 인해 황폐된 땅을 개간하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부를 늘렸다. 3대 최부자 손자 최국선(崔國璿)은 벼농사에 이양법을 도입해 소출량을 늘리니 부가 더욱 늘어 만석꾼의 기틀을 마련한다.

어느 날 최부자 집에서 내려오는 6훈(訓)의 근간이 만들어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최국선은 소위 명화적(明火賊)이라 불리는 도적 떼의 침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곳간이 털리고 문서가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보고 보니, 공동체의 민심(民心)을 얻지 못하면 부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절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빈민 구제책을 펼치며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는 등의 조처를 한다.

그리하여 동학혁명 시절 유일하게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대를 이어갔고 300여 년 동안 경주 최부자 집의 부는 유지될 수 있었다.

◆조모 영양최씨 묘소, 수혈(首穴)로 천하의 대명당

한편으로 이렇게 부자로 살게 된 것은 그의 선대 묘소가 명당임을 암시하고 있다.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에 있는 선대 묘소 현장으로 가 보자. 초입에서 보이는 산들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다. 창고형의 토성체와 노적봉 모양의 현무봉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창고사(倉庫砂)는 효성그룹의 선영과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孫正義) 회장 선대 묘소에서 보이는 산형과 흡사하다. 이는 큰 부자를 배출할 수 있는 기운을 가진 모습이다.

이곳 산록에는 총 8기의 묘소가 있다. 그중에서 두세 번째 묘소가 증조부모 묘소이고 그 아래에 조부모 묘소로 쌍분으로 되어 있다. 많은 묘소 중 조모 영양최씨(英陽崔氏) 자리가 이곳의 수혈(首穴)로 천하의 대명당이다. 요즈음에 비유하면 재벌이 될 수 있는 역량이다.

조부모 묘소로 쌍분으로 되어 있다.많은 묘소 중 조모 영양최씨(英陽崔氏) 자리가 이곳의 수혈(首穴)로 천하의 대명당이다.
조부모 묘소로 쌍분으로 되어 있다.많은 묘소 중 조모 영양최씨(英陽崔氏) 자리가 이곳의 수혈(首穴)로 천하의 대명당이다.

필자는 이 묘소가 후손들이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고 본다. 또한 좌향이 건좌손향(乾坐巽向)이니 무관의 기운도 있다. 그래서 정무공이 무관으로서 명성을 떨친 것이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과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부모 묘소, 이순진(李淳鎭) 전 합참의장 부친 묘소도 건좌 손향이니 땅의 기운이 얼마나 신묘한가!

일반적으로 좋은 용맥은 갈지(之) 자 또는 검을현(玄) 자와 같은 형태로 내려와야 생동감이 있는 좋은 용맥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는 산줄기가 일(一) 자로 축 늘어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라 일부 형기론자들은 사룡(死龍)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이고 이곳은 물형으로 풀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조부모 묘소, 배의 형상으로 박주형(泊舟形)

이곳은 정박해 있는 배의 형상으로 물형으로는 박주형(泊舟形)이다. 혈(穴)은 선장자리에 맺힌다. 조부모 묘소가 그 자리이다. 인공위성 지도를 보면 영락없는 배의 모습이다. 배가 정박해 있으니 생동감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부귀(富貴)가 장원(長遠)한 땅으로 안산은 백포(白布) 돛대를 눕혀 놓은 형상이다. 정박한 배는 돛대를 눕혀놓는 것이 상식이다. 향(向)은 손방(巽方)으로 주역(周易)에서 손(巽)은 바람을 뜻하고 배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니 배의 안산 방위에 부합한다.

다음에는 국풍(國風)을 보내어 장지를 정했다는 정무공 묘소로 가보자. 묘소는 울산 울주군 언양읍 오지산(烏池山) 산록에 위치한다. 묘지 아래에는 울산과학기술원이 들어서 있다. 정무공 묘소는 국풍이 잡은 자리답게 혈처에 정확히 모셨다. 가마우지의 콧잔등 윗부분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의 대명당이다.

조부모 주산인 현무봉
조부모 주산인 현무봉

좌향은 신좌 을향(辛坐乙向)으로 파구(破口)가 갑방(甲方)이니 이기법(理氣法)도 맞다. 정무공 묘소에서 약 50m 위쪽에 그의 셋째아들 현감공 최동량의 묘소가 있다. 안산의 형상이 노적봉 같아 이곳을 점지한 모양인데 여기는 용이 변화하는 곳이기 때문에 혈을 맺을 수 없는 곳이다.

이 자리를 형상으로 풀어본다. 이곳은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저수지에 내려오는 형상 즉, 가막하수형(鴐暯下水形)이다. 인공위성 지도를 보면 새의 모습이 확연하다. 가마우지는 몸 전체가 녹색 광택이 나는 검은색 새이다. 주산 오지산과 묘소 아래에 있는 저수지(가막못) 이름이 가마우지와 연관된 지명이다.

결론적으로 적덕을 많이 쌓으면 복이 온다는 하늘의 이치(天理), 자연이 내어준 대명당 조모와 정무공 묘소의 지기(地氣), 대대로 선조의 가훈을 잘 받들어 실천한 후손들의 인의(人義), 즉 천지인(天地人)이 합일하고 후대에 내려오면서도 2~3대에 걸쳐서 대명당을 취한 덕택에 300여 년간 대부호로 살아온 것이라 하겠다.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노인영 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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