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 (22)

기자가 망명했다는 '명이'…발해조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상서대전 '조선으로 도망갔다'…중국 문헌에 일관된 내용들
주역에는 '명이에 갔다' 표현…조선-명이 동의어라는 근거

은나라 태사, 기자
은나라 태사, 기자
주역
주역

화이사관을 제창한 공자
화이사관을 제창한 공자

▶기자(箕子)가 망명했던 고조선

기자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태사(太師), 즉 국사를 역임했다. 주왕의 폭정으로 은나라가 망하고 서주(西周)가 들어서자 기자는 새로운 왕조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발해유역의 고조선으로 떠나갔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여러 중국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傳)'의 "무왕이 은나라와 싸워 이기자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쳐 갔다.(武王勝殷 箕子 走之朝鮮)", '한서' 지리지의 "은나라가 도덕이 땅에 떨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갔다(殷道衰 箕子 去之朝鮮)",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武王 乃封箕子于朝鮮 而不臣也)" 등이 그것이다.

이들 기록은 얼핏 보기에는 같은 것 같지만 자세히 분석하면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다. '상서대전'은 "무왕이 은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쳐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은나라가 망한 뒤에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은나라가 도덕이 땅에 떨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은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미리 망할 것을 예견하고 조선으로 떠나갔다는 이야기다.

'사기' 미자세가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다.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면 신하인 것이고 신하가 아니라면 봉하지 않은 것이다. 봉했는데 신하는 아니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기자가 무왕의 분봉을 받으려면 왜 굳이 망명의 길을 선택했겠는가. 조선은 서쪽의 주나라와 멀리 떨어진 동방의 독립 국가로서 서주의 분봉 대상이 아니었다. 기자가 조선을 망명지로 선택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한 것은 조선을 서주의 신하국가로 만들기 위해 자의적으로 조작한 것이며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위에 인용한 세 기록은 내용상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자가 은나라를 떠나 고조선으로 갔다고 본 점에서는 동일하다.

중국 산동성 조현에 있는 기자묘. 이 곳은 본래 상나라 도읍 박성지역이다.
중국 산동성 조현에 있는 기자묘. 이 곳은 본래 상나라 도읍 박성지역이다.

▶발해유역의 고조선을 입증하는 최초의 자료는 '주역(周易)'이다

한국의 반도사학은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자가 당시 은나라의 수도 하남성 안양에서 망명객 신분으로 중간에 여러 이민족 국가를 경유하여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평양까지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조선에 대한 위치설정이 잘못되었다. 고조선이 북한의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한다는 것은 거리상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에 고조선은 발해유역의 고죽국 땅,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에 있었다. 송나라 낙사의 '태평환우기'는 노룡현에 기자가 왔던 조선성이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국의 반도사학이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것이, 한漢나라시대 문헌인 '상서대전'에 최초로 보이고 기자 생존 당시인 서주시대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주시대의 기록에서도 기자가 조선으로 갔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주역'에서 말한 "기자가 명이에 갔다(箕子 之明夷)"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주역' 64괘 중 명이(明夷) 괘의 육오(六五) 효사(爻辭)에 나오는 내용인데 문장의 구조상 '상서대전'의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쳐 갔다.(箕子 走之朝鮮)" '한서' 지리지의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갔다(箕子 去之朝鮮)"라는 것과 동일하다. 다만 조선이란 명칭이 명이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명이는 조선의 다른 이름 즉 조선과 동의어로서 이는 기자가 조선에 갔던 사실을 서주시대의 기록인 '주역'이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다만 그동안 중화사관의 영향으로 명이라는 두 글자를 조선의 다른 이름으로 보지 않고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갔다(明入地中)"라고 해석함으로서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것을 서주시대의 기록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주역'의 명이(明夷)를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갔다(明入地中)"고 해석한 공자

'주역'의 명이를 조선의 다른 이름이 아닌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갔다"라고 해석한 것은 공자이다. 이에 공자의 영향을 받은 정자, 주자 등은 명이의 이(夷) 자를 "상처를 입는다"는 상할 상(傷) 자의 의미로 풀이했다. 따라서 공자 이후 수천 년 동안 "기자 지명이(箕子 之明夷)"는 조선과는 상관 없는 내용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명이괘에 명이라는 단어가 무려 9차례나 등장하는데 명이의 이자를 상할 상자로 바꾸어 "밝음이 상처를 입었다"는 명상(明傷)으로 해석하다보니 의미가 잘 통하지 않고 몹시 어색하다.

예컨대 명이괘 육사(六四) 효사의 "획명이지심(獲明夷之心)"을 "밝음이 상한 마음을 얻었다"고 해석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명이의 마음을 얻었다"고 풀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갑골문에 의하면 조(朝) 자는 본래 두 개의 십(十) 자 아래에 명(明) 자, 즉 맹(萌)으로 되어 있다. 이는 맹(萌)과 조(朝)가 같은 의미의 글자임을 말해준다.

서주 무왕시대에 조선이 국가를 지칭하는 명칭이었다면, 명이는 조선민족을 가리키는 명사였다고 본다. 왜 조선 민족을 지칭하는 명사가 명이였는가.

우리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동방민족으로 발해의 모퉁이 해뜨는 골짜기 (暘谷)에서 살았다. 따라서 명이는 서주시대에 동쪽의 해뜨는 나라에서 광명을 숭배하며 살던 우리민족을 가리킨 말이고, 광명을 숭배하는 동이족이란 말을 줄여서 '명이'라 했다. 우이(嵎夷)처럼 명이(明夷)는 조선과 동의어였다.

그러면 공자는 왜 '명이'를 조선의 다른 이름으로 보지 않고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갔다"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명이(明夷)는 발해조선의 다른 이름이다

명이괘는 곤(땅)괘가 위에 이(불)괘가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坤上離下). 땅은 은나라 주왕, 불은 기자를 상징한다. 이는 기자가 주왕과 같은 폭군을 만나 기울어가는 은나라를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 했으나 결국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기자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명이, 즉 조선으로 망명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치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주역'은 왜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내용을 64괘의 하나인 명이괘에 담아 설명했는가. 기자가 불우한 환경을 당했으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명이에 가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했던 높은 뜻을 기리고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본다.

명이괘의 초구(初九) 효사(爻辭)에는 "군자가 떠나감에 3일 동안 먹지 못하네. 군자가 가는 길에 주인이 걱정하는 말을 하네(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기자가 망명객 신분으로 먼 길을 떠나 명이로 가는 도중에 겪었던 고난의 역정이 배어 있는 내용이라고 본다.

명이괘는 기자가 명이로 떠나가는 출발과정, 중간에 겪은 고난의 역정, 그리고 명이에 도착해서 높은 지위를 얻어 "사방에 빛을 비추는(照四國)" 내용으로 끝맺고 있다.

'주역'의 "기자 지명이(箕子 之明夷)"는 "기자가 '명이'에 갔다"는 것을 묘사한 기록이 분명한데 공자는 왜 다른 해석을 한 것일까.

첫째는 화이사관(華夷史觀)이다. 공자는 중화를 높이고 동이를 배척하는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동이족의 수령 치우와 화하족의 수령 황제가 탁록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공자는 화이사관에 입각하여 치우를 악마로 비판했다. 화이사관에서 본다면 명이는 화하족이 아닌 동이족으로서 비판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가 현자로 추앙하는 기자가 그곳에 갔다는 것을 천명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후인에 의한 개작의 가능성이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 고조선과 동이족에 관한 기록의 조작과 왜곡이 무수히 발견된다. 이 부분도 명이의 존재가 '주역'에 의해서 부각되면 발해유역의 지배자 고조선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개작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혹자는 '주역' 경전을 어떻게 감히 손대느냐고 이견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서경'의 요전편에 나오는 "경수민시(敬授民時)"를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민(民) 자를 피하기 위해 "경수인시(敬授人時)"로 개정한 것을 본다면, 경전의 문자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주역'의 "기자 지명이(箕子 之明夷)"는 3천 년 전 발해유역에 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했다는 것을 '주역'으로 입증하는, 한국 상고사연구에서 매우 획기적인 기록이다. 한양조선의 유학자들은 공자의 권위에 눌려 감히 이러한 주장을 할 엄두를 못냈다. 필자는 '명이'는 우이(嵎夷)처럼 발해조선의 다른 이름이라고 확신한다.

심백강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shimbg200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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