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터뷰] '52년 매화 외길' 안형재 한국매화연구원장…"명맥 이을 수만 있다면 가진 것 기꺼이 제공"

안형재 한국매화연구원장이 영주 선비세상 내 매화분재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안 원장이 가르키고 있는
안형재 한국매화연구원장이 영주 선비세상 내 매화분재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안 원장이 가르키고 있는 '미인매'는 매화 중 가장 늦게 개화하며 진한 분홍색깔을 자랑한다.

영조 임금의 성은(聖恩)을 입은 매화이자 조선 시대 매화 품평회에 도맡아 장원을 했다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가 있는 정릉의 '정릉매'. 전남 고흥 소록도에 딱 한 그루 남아있던 것을 2012년 태풍 볼라벤으로 쓰러져 죽기 전 가지를 꺾어다 접을 붙여 길러냈다. 창덕궁에서 자라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뻇겨버린 '와룡매'. 400년 만에 일본 정부의 협조를 얻어 생태조사를 실시하고 가지를 꺾어와 길러내 보존하고 있다.

"안 원장님 아니었으면 '정릉매'와 '와룡매'는 영영 못 볼뻔 했네요" 영주 선비매화공원을 찾은 기자는 탄성을 내질렀다. 한국 매화를 지켜낸 것은 단 한 사람. 바로 안형재(84) 한국매화연구원장이다. 기자는 지난 15일 국내 매화의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안 원장을 만났다. "분재원에 있는 매화 361점 이름을 하나하나 읽고 거기 읽힌 사연을 더듬으며 본다면 반나절도 모자랍니다. 오늘 시간 많이 내셨죠? 매화 이야기 들으려면 끝도 없을 겁니다. (하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매화문 옥도장, 기림사 대적광전문살 매화문, 이조백자 매조문양, 범어사 독성전 솟을 매화문.

-자식처럼 가꿔오던 163품종 361점의 매화분재를 이곳에 기증 하셨다고 들었다. 일본에서 10억원을 호가하는 수령 100년 이상 된 매화분재도 다수 포함됐다고.

▶매화 종주국 중국이나 매화문화가 잘 발전된 일본의 '나가하마 분매 전시회'에도 이렇게 다양한 분매가 없다. 그만큼 자부심이 크다. 특히 입구에 있는 매화 분재는 여기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인데, 대작(大作)이기도 하거니와 '명매(名梅)'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분재다.

일본 전시회에 올라온 최고 작품이 키 175cm에 나이 350살인데, 선비 매화 공원의 분재는 이보다 더 크고 더 늙었다. 적어도 일본 것보다는 더 크고 나이도 더 많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전남 담양 창평면 야산에서 어렵사리 옮겨와 분매로 배양한 450년생이다.

-분재동호인들에 따르면 원장님이 매화공원에 기증한 분재는 시가 100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하더라.

▶그것은 과장된 얘기다. 영주시와 MOU를 맺을 당시 영주시와 내가 각각 부담하기로 약정된 내용에 따라 처리된 것이다. 다만 매화 박물관과 매촌 기념관을 함께 열기로 하여 그동안 내가 수집해 놓았던 박물관 전시자료 190여점도 함께 무상 기증했는데 8년째 수장고에 보관만 하고 있는 실정이라 아쉽다. 매화 문양이 들어있는 도자기, 문방사우, 규방용품, 비녀, 베게, 매화도, 매화시 서예작품 등이 이에 속한다.

안형재 원장의 분매 조각 작업 모습. 왼쪽부터 작업 전, 작업 중, 작업 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매화문 옥도장, 기림사 대적광전문살 매화문, 이조백자 매조문양, 범어사 독성전 솟을 매화문.

-하루빨리 매화 자료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조금 기본적인 질문일 수 있겠는데, 분재 화분 속 매화와 노지에서 피는 매화는 뭐가 다르나

▶노지에서 자라는 매화는 뿌리를 맘껏 토양 속에 뻗어 내릴 수 있다. 대신에 온갖 풍수해 등 자연환경에 적응해 가며 살아가야 하는 반면, 한정된 공간인 화분 속에서 살아가는 분매는 식물 생육에 필요한 모든 요건을 갖춘 온실에서 최적의 상태로 커갈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한국 매화 분재의 역사가 꽤 깊다고 들었다.

▶지금은 생소한 취미지만 매화를 분재로 만들어 화분에다 기른 건 역사가 깊다. 기록을 뒤지면 고려 말까지 올라간다. 매화 분재를 '분매'라 부르는데, 분매는 조선 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취미이자 풍류였다. 과장이 섞였겠지만 '조선 선비 열에 아홉은 분매를 길렀다'는 기록까지 있다.

매화의 역사는 더 깊다. 고구려 대무신왕 24년 "매화꽃이 피었다"라는 기록과, 일연의 삼국유사 제3권 아도가라 맨 끝에 보면 "모랑의 집 매화나무에 꽃을 피웠네"라는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형재 원장의 첫 책. 한국 매화의 역사를 정리한
안형재 원장의 분매 조각 작업 모습. 왼쪽부터 작업 전, 작업 중, 작업 후

-이러한 매화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 '한국의 매화'인 것 같다. 원장님의 첫 책 '한국의 매화' 이전에는 이런 매화의 역사를 정리한 단행본 한 권이 없었더라. '한국의 매화' 발간에 아내 김영자 씨의 도움이 컸다고.

▶그렇다. 무려 7년간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아내와 함께 자료와 고서를 뒤져 발굴한 기록들을 담은 책이다. 매화에 대한 기록이 한 줄이라도 나오면 그게 우리의 수확이었다. 중노동이 따로 없었다.

안형재 원장이 분매 조각 작업을 하고 있다.
안형재 원장의 첫 책. 한국 매화의 역사를 정리한 '한국의 매화' 출간에는 아내 김영자 씨(85)의 도움이 컸다. 영주 선비매화공원 내 매화분재원에서 매화를 감상 중인 안형재 원장(왼쪽)과 아내 김영자 씨.

-후손의 입장으로 참 감사한 일이다. 그 이후로도 매화 관련 서적 10권을 더 내셨더라.

▶2002년도에 초대 문체부장관을 지냈던 이어령 박사의 전갈이 왔다. 내가 쓴 '한국의 매화' 책자를 보고는 매화에 대한 책을 더 발간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매화 梅花 うめ' 라고 한중일 매화 21명 학자들과 함께 출판을 했다. 독일에서 개최됐던 국제도서전에서 우수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뒤로 우리나라 매화품종의 족보라 할 수 있는 '매보', 전국에 분포 돼 있는 명매와 고매를 8년 동안 조사해 내놓은 '매화를 찾아서' 등 총 11권의 서적을 펴냈다. 아쉬운 점은 북한의 매화를 책에 수록하지 못한 점이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을 때 율곡 이이가 '금강산기'에 기록했던 매화를 찾아 나섰지만 볼 수 없었고, 고매를 발견하긴 했지만 촬영을 하면 인민군에게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여 사진 한 장 못 남겼다.

영주시 선비매화공원 내 매화분재원. 탐매객들이 매화 분재를 감상하고 있다.
안형재 원장이 분매 조각 작업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매화 외길을 사셨다. 언제부터 매화를 시작하신건가.

▶1973년도 그러니까 내 나이 32살 때인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에 매화를 처음 만나게 됐다. 당시 조그마한 매화분재농원을 하셨던 여대기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게 시초다. 그리고 그 길로 여러 선생님들을 찾아 배우다 세계 매화 최고 권위자이며 북경임업대학교수이자 중국공원원사이신 첸진유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국경을 초월한 사제지간의 정리로 열심히 찾아가 배웠다. 그 덕분에 오늘날 '매화분재 명인'이 될 수 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혼자서 뚜벅뚜벅 우직하게 걸어온 셈이다.

-52년 매화 인생이다. 매화에 이토록 집착(?)하게 된 이유라도 있나

▶일제 36년, 6·25 등을 겪으며 한동안 정체 됐던 한국 매화 문화를 다잡고 싶었다. 우리나라가 환난의 반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중국이나 일본에 뒤처진 부분이 많다. 한국의 매화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외길을 걸었다고 표현하면 되겠다. 예를 들자면 영주 매화공원 분재는 크고, 늙고, 둥치가 굵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사뭇 다른 우리나라 분매의 특징이다. 분재원을 조성하면서 우리 분매의 전통을 되살린 것이다. 명맥이 완전히 끊겼던 우리나라 분매의 특징을 옛 그림과 시문을 하나하나 짚어내면서 찾아냈다.

영주시 선비매화공원 내 매화분재원. 탐매객들이 매화 분재를 감상하고 있다.
영주시 선비매화공원 내 매화분재원. 탐매객들이 매화 분재를 감상하고 있다.
안형재 원장이 그린 매화 그림.
영주시 선비매화공원 내 매화분재원. 탐매객들이 매화 분재를 감상하고 있다.

-매화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도록 노력한 것도 이 때문이겠다.

▶우리나라에 어떤 매화들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8년 동안 찾아 헤맸었다. 우리나라 서원, 고택, 정자 등 자료를 요청하여 하나하나 찾아 나선 결과 모두 85주의 고매와 명매를 발견했고, 이 가운데 10그루를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 지정 요청 했다. 그 중 5그루는 2007년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고, 구례 화엄사 '각황매'도 최근 추가 지정됐다. 나머지 4그루는 각 시·도 지정문화재로 지정토록 권유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매화 품종은 얼마나 되나.

▶조선 중기 문신인 인재 강희안 선생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라고 할 수 있는 양화소록에는 매화의 품종이 열 가지가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이후 발행된 여러 문헌에도 대략 아홉 종에서 열 세종이 있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내가 8년여 동안 전국의 매화품종을 전수조사한 결과 모두 194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매화보'로 발행되어 학계나 언론계 일반 동호인 사이에서도 명칭이나 관계자료를 일관되게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매화를 위해 영주로 귀촌까지 하신 걸로 안다. 어떻게 영주로 오게된건가.

▶사실은 안동시 풍천 쪽 중앙고속도로 IC 인근에 개인적으로 매화공원을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북도청이 이전해 온다는 발표가 있고 부터 땅값이 많이 상승했다. 그래서 내가 보유하고 있는 매화분재와 160여종의 매화품종 2,200여 주, 그동안 전국에서 수집해 왔던 고매 등을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에 제공하여 관광소득자원으로 매화공원을 추진하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

세종시, 신안군, 울진군, 안동시 등에서 러브콜이 왔으나 여러 이유들로 머뭇거리는 사이 이상희 장관의 주선으로 영주에 조성하게 됐다. 그리고 나는 순흥 안가로써 영주 순흥이 관향지이기 때문에 경기도 안양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 오게 된 것이다.

안형재 원장이 그린 매화 그림.
안형재 원장이 그린 매화 그림.
안형재 원장이 그린 매화 그림.

-지금도 손수 매화를 가꾸나

▶당연하다. 매화는 나의 친구이자 형이요 애인이고 내 건강을 지켜주는 주치의이기도 하다. 지금도 분매소재 약 800여 점과 수지매 약 500여 점, 그 밖의 매화 약 이 만여 주를 기르고 있다. 대가족인셈이다. 그것들을 통해 활기차게 건강을 지켜 나가고 그들과 수많은 이야기와 교감을 나누며 매화시를 쓰고 부와 노래를 짓기도 한다.

-우리나라 매화공원의 실태는 어떻나.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과 해남군 산이면, 순천의 월등 등지에는 커다란 매실 농장들이 있어 이른 봄 매화꽃이 필 때면 남해안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될 만큼 탐매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당시 이성웅 시장이 다압면 일대의 매실 밭들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를 통하여 나에게 자문을 부탁해 몇 년 동안 맡아 줬다. 그 결과 50여 억을 들여 매 문화관을 건립하고 매화정, 주차장 확충 등 많은 부분의 면모가 달라졌다.

또한 수자원공사는 1조 2천억을 투자해 서해 아라뱃길 수향팔경 중에 하나인 '매화동산'을 품위있게 만들었고, 삼성물산 리조트사업부 용인 자원농원이 꾸며놓은 '하늘매화길' 공원 조성 사업에도 자문을 해 주었다. 그리고 영주의 매화공원이 국내에서는 최초의 규모 있는 매화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맨 처음 설계대로 공사가 진행되지 않은 채 8년 동안 지지부진한 상태라서 아쉽고 답답할 뿐이다.

-고령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앞으로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구십을 앞둔 나에게는 단 한 가지 버킷리스트만 남았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1만평 규모· 500여 주의 소재 '수지매공원(수양버들처럼 늘어진 매화)'을 조성하는 것과 약 1,000여점의 고매와 명매의 분매로 세계적인 분매원에 '매촌기념관'을 곁들여 꾸미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국내 전무후무한 매화공원으로써 경제적으로는 물론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거다. 국가기관이나 지자체, 기업체나 개인 등 누구라도 이와 같은 일을 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다 제공하여 한국매화의 터전을 마련하고 싶다.

하얀 눈송이를 뿌려놓은 듯. 올해도 어김없이 매화가 활짝 폈다. 그리고 3월. 가장 늦게 핀다는 미인매까지 끝끝내 봉우리를 터뜨렸다. 한국 매화의 명맥을 이어가려 끊임없이 달려온 안 원장의 모습에서도 인내와 지조의 매화의 향기가 풍기는 듯 하다.

"모든 꽃이 잠들어 있을 때 눈과 추위를 극복하고 피어난 매화. 이 모습은 강인한 우리 민족의 정체성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서도 각자 어려움이 있을테죠. 하지만 만난을 극복하고 달나라 선녀처럼 활짝 피어 미소 짓는 매화처럼 슬기롭게 인내하고 지혜롭게 참고 견디면 반드시 그 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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