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향래의 소야정담(小夜情談)] 코미디 공화국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KBS '유머 1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본격적인 정치 풍자의 시초로 꼽는 사람이 많다. 1980년대 중반을 풍미했던 이 프로그램은 김형곤·김학래·엄용수·정명재·양종철 등 당대의 스타 개그맨들이 출연해 정치권과 사회 현안을 신랄하게 풍자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이라고 했던 유행어는 지금의 여야 정치판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병조가 진행한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과 최양락·임미숙이 황제와 황후로 출연한 KBS2 '쇼 비디오 자키'의 '네로 25시' 등도 사회 현상과 정치 문화를 꼬집은 시사 풍자 코너로 인기를 끌었다. 2000년대에 들어 코미디언 최양락과 개그맨 배칠수가 성대모사로 분한 3金(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옥신각신 갑론을박 실수를 연발하며 시사 문제를 풀던 '3김 퀴즈'도 잊을 수 없다.

상당한 기간 한국의 정치적 지형과 지분을 나눴던 세 정치인을 등장시킨 MBC 라디오의 '3김 퀴즈' 장수 비결도 권력자에 대한 풍자성이었다. 2012년 방영된 tvN 'SNL 코리아 시즌 3'은 대선 토론을 풍자해 인기를 얻었다. 김슬기·김민교·정성호가 당시 대선 후보였던 이정희·문재인·박근혜를 각각 맡아 연기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20년대의 오늘날, 그런 정치 풍자 코미디는 사라졌다.

30년 전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전설적인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는 여의도에서 임기를 마치면서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국회 코미디는 낭만이라도 있었던가. 최소한의 품격이라도 있었던가. 적어도 요즘처럼 저질스럽고 야만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코미디언이 설 자리가 없다. 코미디 프로그램도 필요가 없다.

정치인을 능가하는 코미디언이 없고, 국회의사당보다 더 눈길을 끌 수 있는 코미디의 전당도 없기 때문이다. 제자리 걸음을 해도 시원찮을 우리 정치문화가 그만큼 후퇴했다는 방증이다. 국민이 뽑은 선량(選良)으로, 민의의 대변자로 존경을 받아야 할 정치인과 국회의원의 권위와 위상도 추락 일변도였다. 정치인과 국회의원을 걸인(乞人)은 물론 견공(犬公)과도 비교하는 유머가 생긴지도 오래다.

차마 글로 옮기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언제부터 어쩌다가 우리 정치인들이 이렇게 지독한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일까. 서슬 퍼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엄존하던 정치 풍자의 맥락은 왜 끊어진 것일까.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의 팬덤화이다. 정치적 이슈에 대한 양극화와 정치적 이견에 대한 적대시는 풍자와 해학의 여지를 앗아간다.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살벌한 정치문화가 코미디마저 죽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환멸과 냉소만 가득한 블랙 코미디의 현실 속에 살며 한숨 짓고 있는 것이다. 이 보다 더 기막힌 코미디는 없을 것이다. 퇴임 후 '잊혀지고 싶다'던 전직 대통령이 시나브로 무대에 나와 일갈을 한다. 입시 비리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비례정당 대표가 입시 비리 특검을 주장한다.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전직 당 대표가 옥중에서 '정치검찰해체당' 창당을 선언했다.

법무부 장관 재직시 미운 검찰총장에게 헛발질을 거듭하다가 기어이 대통령으로 등극시킨 일등공신이 한솥밥을 먹던 청와대 비서진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낸 중진 정치인이 하루아침에 당적을 버리고 어제의 적군 갑옷을 입고 출마를 했다. 당 대표와 국무총리를 지낸 집나간 거물 정치인이 텃밭에서 꼼수․위장 탈당 초선 의원에게 완전 KO패를 당했다.

쌍욕과 추문과 온갖 거짓말과 사법 리스크에도 건재를 과시하며 총선을 압승으로 이끌었다. '비명횡사' '친명횡재'의 코미디 파동에도 변함없는 지지를 받았다. 하긴 특정 색깔의 깃발만 꽂으면 70~90%의 묻지마 지지표가 쏟아져나오는 정치판 자체가 이미 코미디 이상이다. 그 뿐인가. 가난 코스프레와 꼼수 증여, 위안부 팔이와 성범죄 변호, 여성 비하와 역사 폄훼, 불법 대출과 배임·투기 그리고 막말과 망발은 기본이다.

불공정·낙하산·고무줄·벼락 공천(사천)으로 코미디 전당에 입성한 위인들도 많다.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뜨거운 논란이 된 강렬한 캐릭터가 기상천외한 코미디 활극을 예고하고 있다. 이제 국민은 상식과 윤리 따위는 보란 듯이 짓밟아버리는 정신 사나운 막장 코미디를 4년 동안 꾸역꾸역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고 손가락질 할 자격도 없다. 그 손가락으로 선택한 코미디언들이기 때문이다.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