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와 충, 학문의 가르침을 전하던 공간인 동시에 유교의 성현(聖賢)을 기리던 장소인 서원. 현대 사회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건축물을 찾아보기 어려운 탓에, 그 기능과 의미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행히 대구 곳곳에는 여전히 서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름철이면 배롱나무 명소로도 이름을 알리는 두 곳을 꼽아 소개한다.
◆ 조용한 골목 끝, 서계서원
대구 북구 서변동의 한 빌라촌. 도심과 아주 멀지는 않지만 주변이 조용해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동네다. 인천 이씨 집성촌 사이에 자리한 서계서원은 이 한적한 마을 어귀를 오랜 시간 지켜왔다.
서계서원은 조선 중기 학자 이문화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1781년 위패를 봉안한 이후 이 일대의 교육과 인재 양성의 중심 역할을 맡아왔다. 서원 내부에는 강학 공간인 강학당과 서고, 동재와 서재, 사당인 숭덕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의 서원이 그렇듯,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강학 공간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배치돼 있다. 숭덕사 계단 위에 오르면 주변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나 아파트가 많지 않아 조용한 마을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당 안에는 서계서원의 중심 인물인 이문화 선생뿐 아니라 조선시대 학자 이주 선생의 위패도 함께 봉안돼 있다. 이주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해 항전에 나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공을 인정받아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길 대신 지역 유림에 머무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의 뜻을 기리는 정자인 '환성정'도 강학당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서계서원 주변을 걷다보면 조선시대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비각을 만나볼 수 있다. 효열각과 창렬각, 정려각이 나란히 서 있는데, 각각 효부와 열부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오늘날과는 다른 당대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효열각은 1864년 세워져, 월성 최씨의 열행을 기리고 있다. 최씨는 시모가 앓아눕자 젖을 짜서 먹여드리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까지 건넸다. 게다가 남편이 먼저 임종하자, 이후 3일 만에 남편을 위해 순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당 한편의 270년 된 배롱나무는 서계서원의 또 다른 상징이다. 여름철 백일홍이 만개하는 7월이면 평소 한적하던 동네에도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오래된 기와지붕과 붉은 배롱나무가 어우러진 풍경 덕분에 사진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왕산 아래 남은 고려의 기억
서계서원에서 차로 10분가량 이동하면 왕산 아래 자리한 신숭겸 장군 유적지를 만나볼 수 있다. 졸졸 흐르는 냇가 옆에 자리한 이곳에는 신숭겸 장군의 초상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가 세워져 있다. 그 아래에는 동재와 서재, 강당 등이 자리해 서원 형태의 공간 구성을 이루고 있다.
유적지 주변에는 흰빛을 띠는 배롱나무 군락이 형성돼 있다. 여름철이면 꽃이 만개해 산책을 나온 가족 단위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계곡과 배롱나무, 고건축이 어우러지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숭겸 장군은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공산 전투 당시 후백제 견훤의 군대가 왕건을 추격하자, 신숭겸은 왕건을 피신시키고 스스로 왕의 복장을 한 채 적진으로 향했다. 결국 그는 왕건을 대신해 전사했고, 왕건은 그의 희생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왕건은 충신을 잃은 슬픔을 오래도록 간직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숭겸 장군의 형상을 짚으로 만들어 행사 때마다 세워두고 살아 있는 사람처럼 예우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지의 규모에도 이러한 애도와 존경의 의미가 담겼다.
이 일대의 지명 상당수도 왕건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유적지가 자리한 왕산은 '왕건을 살린 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팔공산 역시 고려 개국공신 여덟 명을 기리는 의미라는 설이 전해진다. 또 신숭겸의 군사들이 흩어졌다고 해 붙은 '파군재', 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홀로 쉬었다는 '독좌암' 등 공산 전투와 관련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 순탄치 않았던 서원의 역사
이들 서원은 흥선대원군 집권기 시행된 '서원 철폐령'을 피해 가지 못했다. 당시 전국 각지에 난립한 서원들이 군역 회피나 탈세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대대적인 철폐가 이뤄졌다.
서계서원은 이 과정에서 일부 건물이 훼철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지역 유림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점진적인 복원이 이뤄졌고, 1992년 2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 역시 마지막까지 원형 보존을 위해 애쓴 흔적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매판단'이다. 왕산 자락에는 표충사의 현판과 서책 등을 묻어둔 제단이 남아 있다. 특히 현판은 왕이 직접 내려준 사액 현판이었던 만큼, 훼손을 막기 위해 땅에 묻어 보존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쉽게도 일반인은 매판단을 구경할 수 없다.
배롱나무꽃이 가장 짙어지는 여름철, 두 서원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오래된 기와와 푸르른 나무, 조용한 골목과 산자락이 어우러지며 특유의 분위기를 만든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둘러보다 보면, 책으로만 접했던 옛이야기가 의외로 가까운 풍경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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