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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다 먼저 찾은 '안전망'…공권력의 빈틈 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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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피살사건 추모메시지. 매일신문 DB
스토킹피살사건 추모메시지. 매일신문 DB

◆ 보호받고 있지만 안전하지 않았다

"신고하면 보복할까 두려웠어요" 작년 스토킹 피해를 겪은 김모 씨(28)는 신고를 망설였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러닝을 하던 중 일면식도 없는 남성이 여러 차례 자신을 뒤따랐고, 편의점과 제과점 앞에서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본 뒤에야 스토킹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범해지는 스토킹에 결국 김 씨는 경찰에 피해 사실을 알렸고, 진술 조사와 함께 스마트워치 지급과 순찰 강화 등 신변보호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일상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김 씨는 "헬스장도 가지 못했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일조차 무서웠다"며 "제도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실제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고 말했다.

수사 과정에서 들었던 말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거부 의사를 표현했느냐',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느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는 그런 질문들이 너무 상처였다. 그 사람 앞에서 거부 의사를 밝히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위험이라고 느꼈졌기 때문이다"

스토킹처벌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며 피해자 보호 제도를 지속적으로 보완해 왔다. 반의사불벌죄가 폐지됐고, 접근금지와 통신금지,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유치장·구치소 유치 등 단계별 잠정조치도 마련됐다. 신고 직후 경찰이 내릴 수 있는 긴급응급조치와 신변보호 제도 역시 확대됐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의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잠정조치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거나, 위험도 평가 결과에 따라 적용되는 보호 수준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접근금지나 연락금지 조치가 내려진 이후에도 "혹시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호소하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피해자 지원 현장에서는 이러한 불안의 핵심을 단순히 '신고 이후의 공포'가 아니라 '일상의 붕괴'로 본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거지와 직장, 생활반경을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 기존의 삶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에도 법원의 접근금지 등 보호조치가 내려진 이후 강력범죄로 이어진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도가 마련된 것과 피해자가 체감하는 안전 사이의 간극을 보여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씨는 "법이 바뀌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가 실제로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민간 신변보호 서비스를 받는 스토킹 피해자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귀가하고 있다. 일부 피해자들은 공적 보호와 별도로 민간 경호를 이용하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민간 신변보호 서비스를 받는 스토킹 피해자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귀가하고 있다. 일부 피해자들은 공적 보호와 별도로 민간 경호를 이용하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 공백을 메운 민간 신변보호

결국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처벌 결과만이 아니다. 신고 직후부터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리고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전이 이어지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부 피해자들은 민간의 신변보호 서비스를 찾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탐정사무소를 운영하는 탐정법인 JBK 백지연 대표는 "스토킹 의뢰인의 상당수는 경찰에 먼저 신고한 뒤 찾아온다"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혹시라도 가해자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설 신변보호 서비스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수사는 시작됐지만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 피해자는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민간 신변보호 업체 현장요원들이 스토킹 피해자 보호 사례를 공유하며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민간 신변보호는 피해자의 이동 동선과 위험 요소를 사전에 분석해 현장 보호를 지원한다.
민간 신변보호 업체 현장요원들이 스토킹 피해자 보호 사례를 공유하며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민간 신변보호는 피해자의 이동 동선과 위험 요소를 사전에 분석해 현장 보호를 지원한다.

백 대표는 "스토킹 사건은 물론 학교폭력이나 신변 위협 사건도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불안하다'며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탐정사무소를 찾는 사람은 여성만이 아니었다.

상가에서 사업을 하던 한 젊은 남성은 윗층 입주민의 지속적인 살해 협박을 받았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가해자가 불구속 상태였던 탓에, 사업장을 옮기는 이틀 동안 사설 신변보호 서비스를 이용했다. 탐정사무소는 방탄복을 착용한 요원들을 배치해 이사가 끝날 때까지 의뢰인을 보호했다.

학교폭력도 비슷하다. 사건이 접수된 뒤에도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은 학교에서 계속 마주칠 수 있다. 불안감을 이유로 보호 서비스를 문의하는 사례가 많다.

신변보호뿐 아니라 증거 확보를 위해 탐정을 찾는 사례도 있다. 스토킹 사건은 반복적인 행위와 위협을 입증하는 자료가 중요한 경우가 많지만, 피해자가 직접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 자체가 또 다른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탐정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자료를 확보하는 역할을 하지만, 강제 조사권이나 수사권은 없어 국가기관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백 대표는 "의뢰인들이 경찰을 믿지 못해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며 "경찰은 법과 절차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있고, 많은 사건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수사 결과보다 '오늘 안전하게 집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더 절박한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 경찰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2023년부터 스토킹·교제폭력 고위험 피해자를 대상으로 민간 경호업체와 연계한 신변보호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긴급 상황에서 민간 경호 인력을 투입해 경찰 보호를 보완하는 제도다. 민간경호를 맡고있는 현장요원 이모 씨(30)는 "수도권은 경찰과 민간 경호업체 간 협력 체계가 비교적 잘 갖춰진 곳도 있지만, 경상권은 아직 그런 연계가 활성화되지 않은 편"이라며 "지역별 편차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 피해자들이 서로를 찾는 이유

탐정을 찾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피해자들이 만든 상담 모임을 찾고, 온라인 카페와 오픈채팅방에서 같은 피해자를 찾는다. 분야는 다르지만 이유는 비슷하다. 혼자서는 해결 방법을 찾기 어렵고, 국가 제도만으로는 당장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얻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수사를 요청하는 고소장을 제출하기 위해 경찰서 민원실로 향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온라인 피해자 모임을 통해 증거를 공유하고 연대하며 공동 대응에 나서기도 한다. 매일신문 DB
피해자들이 수사를 요청하는 고소장을 제출하기 위해 경찰서 민원실로 향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온라인 피해자 모임을 통해 증거를 공유하고 연대하며 공동 대응에 나서기도 한다. 매일신문 DB

"내 돈을 잃었는데 왜 사기가 아니라고 하나요." 경찰을 찾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송치 결정을 받았던 한모(34) 씨는 가장 답답했던 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가구 제작업을 하는 한모 씨는 최근 인테리어 업체로부터 가구 제작을 의뢰받아 납품을 마쳤다. 그러나 약속했던 대금은 제때 지급되지 않았다. 업체는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다 일부 금액만 송금한 뒤 다시 연락을 끊었다. 한 씨는 애초부터 대금을 지급할 의사가 없었던 것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사기로 보기 어렵다", "민사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답을 들었다. 일부 금액이 지급된 점 등을 이유로 형사상 사기 혐의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한 씨는 "내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돈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며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과 법적으로 기망 의도를 입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결국 '처음부터 속일 의도가 있었다'는 걸 내가 증명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답답했다"고 말했다.

사기 피해자들이 경찰이나 법률기관 만큼이나 온라인 카페와 오픈채팅방, 피해자 모임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혼자서는 자신의 사건이 단순한 채무불이행인지, 형사상 사기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같은 업체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례를 찾고, 계약서와 거래 내역, 문자메시지, 녹취 등 어떤 자료를 확보해야 하는지 정보를 공유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 대응이나 공동 고소를 준비하기도 한다.

결국 한 씨가 찾은 곳은 같은 피해를 겪은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비슷한 피해 사례를 공유하고, 계약서와 거래 내역을 비교하며, 어떤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지, 경찰 신고와 민사소송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경험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혼자서는 막막했던 문제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 제도에 닿기 전 마지막 안전망

이처럼 비슷한 피해를 겪은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나누고 대응 방법을 공유하는 일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넘어 피해자 모임과 민간단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만든 상담 네트워크가 대표적이다. 어떤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지,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법적으로 무엇을 입증해야 하는지를 함께 찾는다.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의 정태운 공동위원장은 피해자 모임이 생기는 이유를 "같은 피해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 위원장은 "사기 피해는 한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경우가 드물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수법, 같은 가해자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피해 회복과 법률 지원을 받기 위해 현장 상담을 받고 있다. 피해자들은 온라인 피해자 모임을 중심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연대하며 공동 대응에 나서기도 한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피해 회복과 법률 지원을 받기 위해 현장 상담을 받고 있다. 피해자들은 온라인 피해자 모임을 중심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연대하며 공동 대응에 나서기도 한다.

그는 국가기관과 피해자 모임의 역할이 다르다고 봤다. "국가기관은 법과 제도 안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피해자들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끼리 계약서와 자료를 비교하고, 피해가 반복된 구조를 함께 찾아낸다. 혼자서는 보이지 않던 단서가 여러 사례를 모으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정 위원장은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제도보다 먼저 서로를 찾는 이유로 '공감'을 꼽았다. 그는 "어딜 가도 '왜 그런 계약을 했느냐'는 말을 먼저 듣는 경우가 많다"며 "같은 피해를 겪은 사람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상황을 이해한다. 함께 사건을 들여다보다 보면 경찰이나 변호사보다 사건 구조를 더 깊이 파고드는 피해자들도 생기고, 각자가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역할을 나누면서 해결 가능성도 커진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결국 국가가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은 '시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법과 제도가 있다는 이유로 '사기가 맞는지부터 피해자가 증명하라'는 접근이 반복되면 피해자는 도움을 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좌절하고 돌아온다"며 "제도도 중요하지만 피해자를 바라보는 관점과 상담 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피해자들이 탐정이나 피해자 모임을 찾은 이유는 국가를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신고 이후의 불안을 견디고, 흩어진 증거를 모으고, 복잡한 절차를 이해하며 다시 일상을 이어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스토킹 피해자는 자신의 위험을 설명해야 했고, 사기 피해자는 피해가 사기였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은 공권력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 제도에 닿기 전 피해자들이 기댈 수 있는 또 하나의 안전망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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