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셔츠 한 장이 시작된 날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아이도, 학교 문을 넘는 순간부터는 어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홀로 선다. 그곳에서 그 아이를 지켜주는 것은 결국 같은 반 친구들의 태도다.
2007년, 캐나다의 한 시골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새로운 학기 첫 날, 9학년 학생 한 명이 분홍색 셔츠를 입고 등교했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했다. 몇몇이 그 아이를 둘러싸고 조롱했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본 12학년 학생 두 명이 그날 밤 결심했다. 다음 날, 학교 근처 상점의 분홍색 티셔츠를 있는 대로 사들여 아침 일찍 학교 정문에서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그날 아침, 학교는 온통 분홍빛이었다. 놀림을 당했던 아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놀린 이들을 향한 비난이나 응징이 아니었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핵심중의 하나이다. 누구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의 곁에 조용히 함께 서는 것. 그리고 그 하루가 지금 캐나다 전역이 매년 2월 마지막 수요일에 지키는 '핑크 셔츠 데이'의 시작이었다.
◇ 방관자가 방어자가 되는 순간
캐나다는 '서로 다른 것이 녹아 하나가 되는 사회'보다, '서로 다른 것이 그대로 함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배운다. 미국식 용광로가 아니라 모자이크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나와 다른 사람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핑크 셔츠 데이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간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진짜 증명한 것은 따로 있다. 괴롭힘이 벌어질 때 주목해야 할 사람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던 '다수'라는 사실이다. 평범한 다수가 침묵하지 않고 피해자 곁에 서는 순간, 가해자는 힘을 잃는다. 가해자가 계속해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주변의 침묵을 동조나 용인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지금 캐나다의 학교들이 왕따 예방 교육에서 가장 공들이는 지점도 여기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이 아니라, 방관자를 방어자로 바꾸는 법을 가르친다. 지금은 정부와 교육청, 대기업과 노동조합까지 이 캠페인에 함께 나서며, 한 사람의 존엄을 지키려던 몸짓을 사회 전체가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주고 있다. 이 사회가 안전과 포용을 지키는 방식은 결국 가해자 색출이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를 움직이는 일이었다.
◇우리는 누구를 보고 있는가
한국에서 학교폭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고정한다. 누가 더 나쁜가, 누가 얼마나 다쳤는가. 처벌 수위는 얼마가 적정한가. 그런데 그 교실에는 언제나 제3의 존재가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어쩌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을 아이들이다. 오늘의 피해자가 살아남기 위해 내일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 역시 다른 어딘가에서는 피해자였을 확률이 높다.
사람을 악인과 선인으로 나누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풀리지 않는 이유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질문은 "누가 잘못했는가"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일지 모른다. 가해자를 찾아 처벌하는 일은 사후 약방문이지만, 방관자를 방어자로 키워내는 일은 폭력이 애초에 자라지 못하게 하는 면역이다. 침묵을 동조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 침묵 자체다.
2002년, 우리는 거리와 광장에서 함께 응원하며 세계가 놀랄 결속력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러한 결속력이 오직 월드컵 축구 응원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캐나다가 이 질문에 답을 찾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면, 통하면 통하는 민족인 우리는 그 시간을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옆 사람의 침묵을 깨는 작은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해자를 향한 분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방관자였는지를 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 누군가 놀림을 당하는 장면을 마주친다면, 우리는 침묵할 것인가, 그 곁에 설 것인가.
김성열 전 대구문화재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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