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발표한 '8·13 부동산 대책'을 둘러싸고 형평성 논란이 뜨겁다. 만 39세 이하 무주택 청년을 대상으로 LTV를 최대 80%까지 확대하는 '청년미래보금자리론' 등 파격적인 정책금융 3종 세트를 내놓았으나, 정작 주거 안정이 절실한 4050세대 무주택자들은 정책 지원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排除)됐기 때문이다. 만 40세 이상 무주택자는 청년 대상 정책금융과 월세 지원 등 주요 혜택에서 제외된다. 무주택이라는 공통 조건을 갖고 있어도 나이 기준을 넘으면 선택지가 급격히 좁아지는 구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집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나이로 사람을 가르냐" "이 나라에는 청년만 있냐"는 등의 반응이 줄을 잇고 있다. 나이 한 살 차이로 수억 원대의 금융 혜택이 엇갈리는 현상에 중장년층의 박탈감과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청년층의 자산 형성 부족과 생애주기 출발점에서의 주거 안정을 돕겠다는 정부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주거 불안은 특정 연령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령기(學齡期) 자녀를 양육하며 가장 많은 지출을 감당해야 하는 4050 무주택 가구 역시 벼랑 끝에 몰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동안 정부의 주거 정책이 청년·신혼부부·고령층에만 집중되면서, 오랜 기간 무주택으로 버텨온 중장년층은 늘 정책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왔다. 단순히 연령이라는 기계적 기준만으로 정책 혜택을 가르는 방식은 심각한 역차별을 낳는다. 금융당국은 기존 정책 모기지나 가점제를 통한 청약 기회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실질적인 금융 지원 없는 청약 확대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주거 불안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는 국민을 나이로 편가르기 하는 정책은 사회적 갈등만 부추길 뿐이다. 정부는 청년층 표심 잡기 식의 시혜성(施惠性) 지원이나 특정 연령대만을 겨냥한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거 문제는 단순한 연령 차원의 접근이 아닌, 가구원 수와 소득 수준, 무주택 기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포용적 시각에서 풀어야 한다. 전세와 매매 사이에서 고통받는 4050 장기 무주택자를 위한 맞춤형 금융 지원책을 신설해 정책의 사각지대를 메우고 공정한 주거 사다리를 구축하는 것만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2026-08-20 05:00:00
초고속 인터넷,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 보급률, 눈부신 지식·기술 수준, 도시마다 하늘 높이 솟은 끝없는 아파트 라인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초연결사회이자 도시화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형 뒤편에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어두운 고립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지난 10일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38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상 '더 나은 삶 지수(BLI)' 분석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주거 영역 1위, 지식·기술 영역 2위라는 압도적인 성과를 거둔 반면, 인간적 유대감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연결' 영역에서는 최하위권인 37위에 머무른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요청할 친지나 친구가 있는지를 묻는 '사회적 지지(支持)' 지표는 OECD 38개국 중 꼴찌인 38위였다. 이런 사회적 고립은 개인의 정서적 삶마저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36위(6.5점)에 그쳤으며, 부정적 정서 균형 지표 역시 29위에 머물렀다. 물질적 자산이나 주거 환경, 학업 성취도 등 외부적인 성과 지표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막상 삶을 체감하는 개인의 주관적 행복감과 정서적 안녕은 바닥을 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외롭게 만들었는가. 전문가들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개인의 정서적·문화적 발전 간의 박탈감(剝奪感)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경쟁은 갈수록 심화됐고, 타인은 협력과 유대의 대상이 아닌 넘어서야 할 경쟁 상대로 인식됐다. 여기에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대면 상호작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오프라인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됐다. 몸은 물리적으로 밀집된 도시에 살고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철저히 고립된 '섬'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풍요는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연결과 삶의 여유가 부재한 풍요는 사막 위에 세워진 화려한 빌딩과 같다. 껍데기뿐인 성장에서 벗어나, 서로의 삶을 받쳐주는 견고한 사회적 지지망을 다시 구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hanyunjo@imaeil.com
2026-08-13 05:00:00
경상북도장애인종합복지관 봉화분관 "마음을 잇는 선, 피어나는 작품전" 개최
경상북도장애인종합복지관 봉화분관은 지난 10일부터 오는 14일까지 봉화군청 솔향갤러리에서 "마음을 잇는 선, 피어나는 작품전"을 개최한다. 이번 작품전은 봉화군 교육가족과의 사회적 배려계층 지원사업으로, 젠탱글 및 재활프로그램에 참여한 장애인들이 수업 과정에서 직접 완성한 작품을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고, 작품 활동을 통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봉화군보건소,경북지체장애인협회봉화군지회,하눌보호작업장이 연계기관으로 참여해 지역사회 협력의 의미를 더했다. 이날 오프닝 행사에는 최기영 봉화군수, 이승훈 봉화군의회 의장을 비롯해 참여자, 가족, 지역주민 등 70여 명이 참석해 작품전 개최를 축하하고 참여자들의 작품을 함께 감상했다. 특히 참여자들이 정성껏 완성한 작품 하나하나를 관람하며 작품에 담긴 이야기와 제작 과정에 관심을 보였으며, 참여자와 지역주민이 작품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뜻깊은 시간이 마련됐다. 김창숙 경상북도장애인종합복지관봉화분관장은 "이번 작품전이 참여자들에게는 자신의 노력과 성장을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고, 지역주민들에게는 작품을 통해 장애인의 다양한 가능성과 역량을 자연스럽게 만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6-08-11 14:17:08
지난달 한반도는 거대한 가마솥이자 양극화(兩極化)된 기후 실험장이었다. 경남 양산의 낮 기온이 42.5℃를 기록하며 우리나라 기상관측 사상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한반도 남동부 지역이 뜨거운 가마솥을 방불케 하는 동안, 중부지방에는 장맛비가 이어졌다. 낮의 폭염과 밤의 열대야, 지역별로 극명하게 갈린 강수량은 기후 위기가 더 이상 미래의 경고가 아닌 눈앞의 현실임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5일 기상청이 발표한 7월 기상 특성은 단순히 '무더웠던 한 달'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유례없는 이상기후 신호를 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역대급 밤더위다. 지난달 전국 평균 최저기온은 23.4도로, 전국 기상관측망이 확충된 1973년 이후 7월 기준 최고치를 경신했다. 밤 최저기온이 25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일 역시 전국 평균 9.7일을 기록하며, 종전 기록인 2024년 7월(8.8일)과 1994년 7월(8.5일)을 제쳤다. 또 다른 특이점은 극심한 더위가 특정 지역에 집중됐다는 것이다. 대구 22일, 경북 구미 21일, 경남 밀양 20일 등 영남권은 한 달의 절반 이상이 폭염에 시달렸다. 반면 서울의 폭염일수는 2일에 그쳐 한반도 남북 간의 기온 격차가 현저(顯著)했다. 비의 양상 또한 극단적이었다. 7월 전국 강수량은 220.2㎜로 평년(296.5㎜)의 72.3% 수준에 그쳤다. 북태평양고기압이 예년보다 빠르게 한반도를 덮으면서 정체전선이 남부지방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중부와 북한 상공만을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부 지역은 6월에 이은 비 부족으로 한 달 중 20.7일 동안 기상 가뭄을 겪어야 했다. 이번 7월의 기후 데이터는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폭염과 가뭄, 집중호우가 국지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기후 양극화' 현상이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간 폭염 대응 위주의 기존 방재 시스템에서 더 나아가 야간 열대야와 지역별 폭우, 가뭄·단수 대책까지 포괄하는 다층적(多層的) 대응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지구 온난화가 초래한 한반도의 열대화 현상 앞에 더 이상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지자체와 정부가 기후변화 적응 대책을 재점검하고, 에너지 및 수자원 관리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2026-08-06 05:00:00
[세풍-한윤조] 향찰(鄕察) 개혁 없이 경찰 신뢰 없다
이른바 '장윤기 사건'에 이어 최근 경남 지역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경찰청 간부의 성비위 및 승진 청탁, 인사 개입 의혹까지 불거지자, 경찰 안팎에서는 이른바 '향찰(鄕察)'에 대한 구조적 해결의 필요성이 연일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응해 경찰청은 '경찰 수사 신뢰 제고를 위한 쇄신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며, 총경·경정급 중심의 타 시·도 순환근무를 경감급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국회가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동일 경찰서에서 10년 이상 장기 근무 중인 경찰관은 무려 1만7천 명을 넘어선다. 지역과 유착해 비리를 저지르는 일부 경찰을 뜻하는 '향찰'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비판적 수사가 아닌 치안 현장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국민의 우려가 상당하다. 경찰 조직의 중간 허리이자 현장 실무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경감과 경위 계급이면서 10년 이상 동일 경찰서에서 근무하며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이들이 경감 5천209명, 경위 8천697명에 달해 현장 지휘관 4, 5명 중 1명에 달한다. 지역 장기 근무는 지방으로 갈수록 심각하다. 서울경찰청의 경우 10년 이상 동일 경찰서 근무자 비율이 8.4%에 불과하지만, 일부 지방청은 소속 경찰관 5명 중 1명꼴로 장기 근무자일 정도다. 지방일수록 경찰서 수가 적고 생활권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기 근무 구조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역 사정과 인적 네트워크에 밝아 신속하고 밀착된 치안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부분은 장점인 반면, 그 '밀착'(密着)이 한 끗 차이로 '유착'(癒着)으로 변질될 경우 조직 전체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 수 있는 '양날의 검'인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경찰청이 내세운 순환인사제가 그 해법이 되기에는 한계가 크다. 1만4천 명이 넘는 경찰을 강제로 순환근무시킨다면 자녀 교육, 주거, 가족의 생활 기반이 한순간에 흔들리게 돼 조직 내부의 극심한 사기 저하와 반발이 일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또 강력·형사 등 장기적인 수사 연속성과 노하우가 필수적인 부서에서는 치안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순환'이 아니라 '현실적인 근무 환경과 제도 정비'를 통해 지방 근무를 피하려는 현상을 먼저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군 단위나 농어촌 등 근무 선호도가 낮은 지역에 대한 관사 확충, 주거비 및 교통비 지원, 인사상 인센티브 제공 등 고질적인 지방 근무 환경 개선이 선행된다면 자연스럽게 지방 근무를 자원하는 이들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또 무리한 전국 단위 이동보다는 인접 경찰서 간 권역 단위 순환인사를 활성화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생활권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부작용은 줄이면서도 특정 경찰서에서의 장기 독점을 막을 수 있는 타협점이 될 수 있다. 아울러 단순히 계급 기준의 순환인사만이 아니라 실제 비위(非違) 및 유착 가능성이 높은 직위와 업무 유형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돼야 할 필요가 있다.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엄정하고 공정한 법 집행에서 나온다. 장기 근무 시스템을 이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비판 여론을 의식한 보여 주기 식 정책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합리적인 인사 개혁안에 대한 숙고(熟考)가 중요하다. 비위와 유착을 사전에 감지하고 엄단할 수 있는 투명한 감찰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인사이동은 그저 비위의 장소만 옮기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
2026-07-29 05:00:00
외국인이 자국 현지 은행에 개설한 원화 계좌를 통해 다른 외국인과 원화를 주고받는 길이 열린다. 정부가 발표한 '원화 국제화 로드맵'에 따라 역외원화결제기관 제도가 신설되고, 오는 9월 시범 운영을 앞둔 한국은행의 '원화국제결제망'이 내년 1월부터 24시간 가동될 예정이다. 외환시장 24시간 개장에 이어 글로벌 기준 매매기준율(TWAP) 도입, 현지통화직거래(LCT) 활성화, 원화 표시 스테이블코인 거래 근거 마련까지 원화 거래의 진입장벽을 대폭 낮추는 전향적 조치들이 잇따르고 있다. 1992년 자본시장 개방 이후 약 30년간 위기 예방과 통제에 집중되었던 외환 정책의 패러다임이 원화의 활용성을 고평가하고 영토를 넓히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중대한 계기다. 세계 외환 거래에서 원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1.8% 수준으로 세계 12위에 그친다. 무역과 경제 체급에 비해 원화의 국제적 통용성이 크게 떨어졌던 배경에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형성된 달러 유동성 경색의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시장 중심의 까다로운 신고·규제 체계가 유지되었고, 글로벌 투자자들은 계좌 개설 마찰과 야간 환전의 불통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다. 결과적으로 원화 환위험 헤지 수요가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으로 몰리면서, 투기성 거래가 국내 현물환율을 흔드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되기도 했다. 이번 로드맵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이러한 접근성 한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했다는 점이다. 과거 호주가 외환 규제를 철폐하고 역외 시장을 키워 소규모 개방경제의 한계를 극복했던 사례와 궤를 같이한다. 특히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 걸림돌을 해소해 만성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는 모멘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시장 개방의 길목에는 감내해야 할 리스크가 공존한다. 원화의 역외 유동성이 커질수록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거나 위기 상황 시 환투기 세력의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될 위험을 배제하기 어렵다. 외환당국이 전면 개방 단계적 자유화를 채택한 이유다. 정밀한 모니터링 체계를 바탕으로 단계적 규제 완화를 차질 없이 진행하는 과정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2026-07-23 05:00:00
7월부터 코스피 상장유지 시가총액 기준이 300억원으로 상향되는 등 상장유지 제도가 대폭 강화되면서 무더기 상장폐지 위기에 처한 저가주들이 속출한 가운데, 뜻밖의 구원투수를 만나며 기사회생한 기업들이 있다. 바로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지켜 온 토종 기업인 한성기업과 모나미다. 이들 기업은 지난달 말 기준 시가총액이 각각 261억원, 227억원에 불과해 상장폐지 우려에 직면했지만 좋은 기업은 '돈쭐'(돈을 써서 혼쭐내준다는 반어법)을 내줘야 한다는 소비자들의 집단적 연대로 극적인 반전(反轉)을 맞이했다. '크래미'로 잘 알려진 한성기업은 25년 넘게 유엔 참전 용사를 위한 평화음악회를 묵묵히 후원해 왔다는 미담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재조명되면서 "기업이 상폐되게 둬서는 안 된다"는 소비자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주식 및 제품 구매 인증 글이 쏟아지며 한성기업의 주가는 이틀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는 등 급등 가도를 달렸고, 단숨에 시가총액 500억원을 넘어섰다. 불길은 모나미로도 옮겨붙었다. 모나미는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촉발된 '노 재팬(NO JAPAN)' 운동 당시, 주가가 한 달 만에 250% 이상 치솟으며 대표적인 애국 테마주로 각인된 바 있다. 이번 상장폐지 위기 속 SNS에는 "애국 기업 모나미 살리자" "메이드 인 코리아 절대 지켜"와 같은 슬로건과 함께 자발적인 10주 사기 운동 등이 확산됐고, 시가총액 300억원 돌파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시장에서는 이 현상을 두고 단순한 애국 소비의 프레임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주주 행동주의'라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이 훈훈한 감동 서사 이면에는 자본시장의 냉혹한 현실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시적인 유동성과 정서적 연대에 의존한 테마성 상승은 결국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대중이 보여준 '애국 매수'는 위기에 처한 토종 기업에 단순한 자금 수혈(輸血)이 아닌 체질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을 벌어준 것이다. 이제 경영진은 뼈를 깎는 경영 혁신과 신성장 동력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생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힘이 되어 준 소비자들에게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2026-07-16 05:00:00
기술의 진보는 언제나 인간의 삶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스마트폰이 손안의 세상을 열었다면, 손을 쓰지 않고도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거나 음성 명령을 통해 인공지능(AI)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AI 안경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디지털 영토로 편입하겠다는 야심 찬 선언이다. 실제로 '메타 안경(Meta Glasses)'을 비롯한 AI 안경은 세계적으로 수백만 대가 팔려 나가며 일상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 혁신의 이면에는 벌써 '변태 안경'이라는 모욕적인 오명이 따른다. 타인의 일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할 수도 있는 윤리적 허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공포는 감시를 인지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뷰파인더'에 있다. 기존의 불법 촬영 기기는 소지나 은닉 자체로 사회적 지탄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반면, AI 안경은 '스타일리시한 웨어러블 기기'라는 세련된 가면을 쓰고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우리 일상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최근에도 AI 안경으로 데이트 상대 여성을 몰래 촬영한 뒤 해당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남성이 경찰 수사를 받기도 하고, 토익 시험을 치던 2명이 시험관에게 적발되는 등의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했다. 내 옆에 앉은 이가 나를 바라보는 평범한 시선 자체가 언제든 나의 음성과 모습을 무단 수집하는 은밀한 도청기이자 카메라가 되는 위험성을 배제하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이동형 영상정보처리기기로 촬영할 때 불빛이나 소리로 촬영 사실을 명확히 알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그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촬영 중임을 알리는 소형 표시등(LED)을 가리는 방법이 온라인에 넘쳐나고, 앞면 표시등에 불이 켜졌는지 볼 수 없게 하는 차단 커버까지 유명 쇼핑몰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시장에 대비해 입법자들과 규제 당국은 이제라도 새 기술의 위험성을 직시(直視)하고 법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AI 안경 등과 같은 웨어러블 기기가 확산할수록 촬영 고지와 사전 동의, 불법 촬영물 유포 방지, 표시등 변조 차단 등 '기술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방치된 윤리적 공백을 메우는 실효성 있는 제도적 안전망(安全網)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2026-07-14 05:00:00
최근 Z세대를 중심으로 '엄미새'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엄마에 미친 사람'을 뜻하는 이 거친 표현은, 역설적이게도 엄마와 여행을 떠나고 쇼핑을 즐기며 일상을 공유하는 젊은 층을 친근하게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과거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자녀를 '마마보이'나 '마마걸'이라 부르며 독립성 결여(缺如)를 꼬집는 놀림조였던 것과 달리, '엄미새'는 자녀 본인이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유대감(紐帶感)을 자랑스럽게 선언하는 표현에 가깝다고 한다. 이런 가족 밀착형 트렌드의 배경에는 젊은 세대의 달라진 가치관이 자리한다. 다수와 얕은 친분을 만들기보다는 소수와 깊은 관계에 집중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청년층에서 연애하지 않는 비율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비혼 청년의 상당수가 자발적 비연애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삶에서 굳이 갖추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연인·연애를 상위에 꼽기도 한다. 과거 연인이 담당했던 정서적 지지와 공감, 일상 공유의 역할을 이제는 나를 가장 잘 아는 가족이 대신하는 셈이다. 새로운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는 일정 정도의 피로감이 따른다. 시간과 비용,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연애나 타인과의 관계 맺기보다는 조건 없는 지지와 편안함을 주는 가족 안에서 정서적 밀착(密着)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마냥 훈훈하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 이면에는 청년들이 마주한 팍팍한 주거 현실과 경제적 불안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 20대 청년층의 부모와 동거 비율은 OECD 평균을 크게 웃돌며, 독립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경제적 여건의 부족이다. 최근에는 부모와 함께 살며 청소, 요리 등 가사를 담당하고 생활비를 지원받는 '전업(專業)자녀'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부모 의존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 가족 구성원 간 역할을 나누는 새로운 경제적 공생 관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엄미새'나 '전업자녀' 현상은 청년들이 사회에서 겪는 불안을 완충해 줄 안전망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방증(傍證)한다. 취업 시장의 높은 문턱과 경기 침체, 사회의 날 선 평가 속에서 지친 청년들이 찾아낸 유일한 안식처가 가장 원초적인 단위의 사적 관계인 부모 품이라는 점은 서글픈 현실이다.
2026-07-09 05:00:00
[세풍-한윤조] 물·전기·사람 없는 '정치 반도체 클러스터'
지난 29일 정부가 삼성·SK 등 대기업 총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 발표한 '3대 메가프로젝트'에 대해 언론과 관련 업계 등에서 일제히 의문을 쏟아내고 있다. 부지만 있을 뿐 물·전기·사람 인프라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뭘 하겠냐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사업을 유치한 광주전남만 쾌재를 부를 뿐 어느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정부의 발표였기 때문이다. 국가 미래 먹거리를 위한 대도약의 모멘텀을 만들겠다는 취지도, 비수도권 지역 균형발전도 필요하지만, 화려한 숫자와 거창한 수사(修辭) 이면에 가려진 부실한 현실을 뜯어보면 기대보다 우려가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과연 이 거대한 투자가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정치적 압박 없이, 기업들이 온전히 자율적이고 시장 논리에 기반해 내린 결정인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다. 반도체 공장은 기업의 명운(命運)을 건 초정밀·첨단 제조 시설이다. 입지 선정의 기준은 오로지 안정적인 인프라와 생태계 구축 가능성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구상은 시작부터 기초 체력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반도체 생산의 필수 3대 요소인 '전력, 용수(用水), 인재'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담보된 것이 없다.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운영에 필요한 전력은 6.3GW, 하루 용수는 65만t에 달한다. 정부는 대책으로 다목적댐과 발전용 댐의 수계를 조정하고, 한빛원전 연장 가동 및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현실은 냉혹하다. 용수 자립도가 20%대에 불과한 호남 유역의 핵심 댐들은 이미 용수 계약률이 100%에 달해 여유 물량이 없다. 기후 변화로 인한 극한 가뭄 시 영산강·섬진강 권역의 물 부족량은 수억t에 이를 것이라는 정부 자체 조사 결과도 있다.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춤을 추는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50%를 넘는 지역에서, 1초의 미세한 전력 흔들림으로도 수천억원의 피해를 보는 반도체 라인을 돌리겠다는 발상 자체가 현장을 모르는 소리다. 간헐성을 메울 대규모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BESS)나 송배전망 인프라 비용 분담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도 빠져 있다. 이런 가운데 낙동강의 막대한 수량에다 원전과 대규모 전력망을 갖추고 있는 대구경북은 정부의 부지 검토 대상에도 오르지 못했다. '사람'과 '생태계'라는 장벽도 넘기 힘들다. 첨단산업일수록 우수 인재 유치와 정주(定住) 여건, 그리고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협력사들과의 유기적인 생태계가 성패를 가른다. 정부는 지방에 수도권에 필적하는 '기업형 첨단도시'를 만들겠다고 공언하지만, 이는 이미 수십조원의 세금을 쏟아붓고도 무늬만 남은 '혁신도시' 모델의 해묵은 재탕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기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조차 지자체 간 갈등, 토지 보상, 초고압 송전선로 반대 민원에 가로막혀 첫 삽을 뜨는 데만 무려 6년이 걸린 사실을 정부는 잊은 것인가? 이런 마당에, 맨땅이나 다름없는 서남권에 구체적인 실행 계획도 없이 팹부터 짓겠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부터 터져 나오는 것이 당연지사다. 글로벌 반도체·AI 전쟁은 기업 간의 싸움을 넘어 국가 총력전이다. 만약 정부의 인프라 지원이 말잔치에 그쳐 서남권 프로젝트가 실기(失期)하거나 표류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무리하게 입지를 선정한 정부와 정치권이 져야 할 것이다.
2026-07-01 05:00:00
국내 증시가 역대 최대 낙폭을 기록한 지난 23일 이른바 '검은 화요일'의 충격을 딛고 이틀 연속 반등에 성공했다. 24일 3% 넘게 상승 마감한 데 이어, 25일에는 미국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어닝서프라이즈 소식이 전해지며 국내 증시도 덩달아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이어갔다. 코스피의 표면적 수치만 보면 시장이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면 아래의 투자심리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일명 '한국형 공포지수'로 불리는 코스피200 변동성지수(VKOSPI)가 지수 산출 이래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24일은 94.81(장중 97.78)까지 치솟았던 VKOSPI는 25일에도 거듭 수치를 높이며 95.08로 장을 마감했다. VKOSPI는 코스피200 옵션 가격을 바탕으로 향후 30일간의 시장 변동성 기대치를 수치화한 지표다. 주가의 방향성보다는 불확실성 자체를 반영하는데, 주가 급락 시 반대로 급등하는 역의 상관관계를 보인다. 미국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의 VIX지수와 유사하다. 통상 금융시장에서는 VKOSPI가 50~60선에 진입하면 투자자들이 이성적 판단을 잃는 '시스템 리스크의 전조'로, 70~80선은 정부의 부양책조차 통하지 않는 '통제 불능의 패닉 국면'으로 평가한다. 이 기준에 비춰 볼 때 현재의 90선 돌파는 말로 설명 불가능한 전례 없는 극도의 불안감을 의미한다. 옵션 시장의 투자자들은 미래의 더 큰 변동성을 예상하며 극도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증권가에서는 최근 VKOSPI 숫자가 급증한 데 대해 최근 등장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레버리지 ETF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미국 블룸버그통신마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추종하는 레버리지 ETF와 관련된 매도세가 겹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했다"면서 "주식시장에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주객전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이 ETF에 대한 개인투자자의 자금 쏠림으로 증시 변동성이 너무 커지자 "드러누워서라도 막아야 했다"고 한탄을 쏟기도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당분간 VKOSPI는 '통제 불능의 패닉 국면'에서 내려올 줄을 모를 것이란 관측이 이어지는 이유다.
2026-06-26 05:00:00
아직 6월 하순인데도 지구촌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서유럽은 폭염(暴炎)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에펠탑마저 단축 운영에 돌입했으며, 한반도에도 예년보다 훨씬 이른 더위가 상륙했다. 지난 18일 서울에 내려진 올여름 첫 폭염주의보는 지난해보다 12일이나 빨랐다. 이런 가운데 이상 고온 현상이 또 다른 물가 상승 압력이 되고 있다. 이른바 '히트플레이션(Heatflation·열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이다. 폭염이 농작물 생육(生育)을 방해하고 가축을 폐사시켜 밥상 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농·축·수산물 가격은 빠르게 치솟고 있다. 축산물품질평가원 축산물유통정보 다봄에 따르면 이달 달걀 특란 10구의 전국 평균 소매가는 5천222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8.6% 뛰었다. 사상 처음으로 5천원을 넘어선 것이다. 닭고기 가격도 20% 가까이 올랐는데, 지난해 겨울 발생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API) 여파에 최근 기습 폭염이 더해지면서 공급이 줄어든 탓이다. 대파, 상추, 수박, 고등어 등 주요 식재료 가격 역시 줄줄이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물가를 자극하는 요인은 한둘이 아니다. 국내 생산자물가지수가 9개월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데다, 여기에 기후 변화라는 통제 불능 변수까지 겹치며 먹거리 물가마저도 출렁이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수급안정대책반을 구성하고, 해양수산부는 정부 비축 수산물을 공급하는 등 물가 잡기에 나섰지만 산지(産地) 생산 저하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기상청이 예고한 7~8월의 살인적인 폭염과 슈퍼 엘니뇨, 태풍 '메칼라'에 따른 게릴라성 호우가 본격화되면 농·축·수산물 공급망은 지금보다 훨씬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다. 거시경제 지표가 아무리 개선된다 한들, 매일 마주하는 장바구니 부담이 줄지 않는다면 민생 회복은 요원(遙遠)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첫째도 물가, 둘째도 물가"라며 사활을 걸 것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갑은 얇아지는데 먹고사는 비용만 치솟으면 체감하는 고통의 온도는 더 높아진다. 벌써 숨이 턱 막히는 계절이다. 다가오는 여름, 달아오르는 날씨보다 펄펄 끓어오르는 밥상 물가가 더 걱정스럽다.
2026-06-24 05:00:00
무너진 교권(敎權)과 학교 교육 현장을 배경으로 가상의 특수 조직 '교권보호국' 감독관들의 활약을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공개 사흘 만에 640만 시청 수를 기록하고 비영어권 쇼 가운데 1위에 오르는 등 국내를 넘어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참교육'의 흥행 돌풍이 급기야 현실 정치와 교육계의 정책 논의로 번지고 있어 우려스럽다.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교육부 내 '교육활동보호국' 신설을 제안한 데 이어, 안민석 경기도교육감 당선인은 작품 속 가상 조직인 '교권보호국'을 경기도에 실제 설치하겠다며 공개 토론을 제안하고 나섰다. 학교폭력 가해자와 악성 민원 학부모를 향해 사적 제재를 가하며 쾌도난마(快刀亂麻)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드라마 속 초법적(超法的) 영웅의 모습에 정치권이 숟가락을 얹는 모양새다. 무너진 교실 질서와 위축된 생활지도 현실에 좌절하던 많은 이들이 드라마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허구적 통쾌함을 현실의 교육 정책으로 치환(置換)하려는 시도는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리 학교 현장의 교권 침해(侵害)가 심각하다고 할지라도, 응징과 폭력을 앞세운 방식은 진지한 교육적 해법이 될 수 없다. 드라마 인기에 편승해 선출직 교육감 당선인이 즉흥적이고 대중 영합적인 제안을 쏟아내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의 교육은 결코 드라마가 될 수 없다. 현장의 교사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거창한 간판을 단 전담 조직이 아니다. 2023년 서이초 사건 이후 '교권보호 4법'이 개정되며 법적 장치가 마련됐음에도 여전히 교사 86%가 교권 침해를 당하고도 신고를 주저하는 현실을 직시(直視)해야 한다. 교사들이 원하는 것은 악성 민원과 보복성 아동학대 신고라는 법적 분쟁의 최전선에 홀로 서지 않도록 돕는 정교하고 실질적인 지원이다. 무분별한 고소·고발에 맞설 전문적인 법률·행정적 조력, 교육청 차원의 강력한 대리 소송 및 법적 대응, 그리고 피해 교원이 안심하고 교단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입체적인 회복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교육은 응징과 통제가 아니라, 성장과 변화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엄숙한 영역이다.
2026-06-17 05:00:00
고환율·고물가·고금리의 이른바 '3고(高)' 위기가 민생 경제를 옥죄고 있는 가운데, 이를 바라보는 이재명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 지나치게 안일(安逸)하고 단편적이어서 우려스럽다. 이 대통령은 지난 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1천550원대까지 치솟은 원·달러 환율에 대해 "높은 것은 사실이나 일시적이라고 본다"고 의견을 밝혔다. 국내 주식시장의 호황으로 외국인들이 자산 비중을 맞추기 위해 주식을 팔고 달러로 환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기적 수요 요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말처럼 외국인의 차익 실현이 최근 환율 급등의 직접적 '트리거'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원화 약세를 단순히 단기적 수급 문제나 주가 상승의 부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위험한 오판(誤判)이다. 벌써 원화 약세는 수개월째 추세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환율 기저에는 훨씬 더 깊고 구조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다.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한국과 미국 간의 금리 격차, 그리고 기업들의 해외 투자 급증이 맞물린 결과다.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도, 기업들이 달러를 국내로 바로 들여오지 않고 해외에 재투자하는 이른바 'D램 달러' 현상 역시 구조적 자본 유출 상황을 만든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이재명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두고 "환율은 더 이상 단발성(單發性) 충격이 아니다"며 "(일시적이란 것은) 정책적 진단이 아니라 수준 낮은 자기 위로일 뿐"이라고 페이스북을 통해 비판했다. 외환 건전성 지표가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양호하다고 해서 정부가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고환율은 수입 물가 상승으로 직결되고, 이는 고스란히 국민의 장바구니 물가와 체감 생활비 압박으로 전가(轉嫁)된다. 원자재 수입 비용 증가로 내수 기업과 자영업자, 저소득층의 고통은 가중된다. 결국 서민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지는 것이다. 국민이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위기를 미화하는 변명이나 막연한 낙관론이 아니다. 외환 당국은 단기적인 구두 개입이나 외환보유액 소진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국민연금이나 한국투자공사(KIC), 민간 보유 달러 자산 등 가용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해 시장의 변동성을 제어할 촘촘한 완충(緩衝)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2026-06-10 05:00:00
[세풍-한윤조] '차악'의 선택이라도 투표는 민주주의의 보루
2주간의 선거 열전(熱戰)이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방선거와 14개 지역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의 본투표가 3일 오전 6시 시작되면서 그 판도라의 상자가 오늘 밤 열릴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선출되는 공직자만 4천227명, 출사표를 던진 후보는 7천723명에 달할 만큼 지역의 일꾼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 난다. 그만큼 투표도 복잡하다. 광역지자체장 및 기초지자체장, 광역 및 기초지방의회의원(지역구·비례대표), 그리고 교육감 등 7명의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데다,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까지 겹치는 곳에서는 무려 8명의 후보를 검토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선거운동이 공약과 정책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당의 색깔과 번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기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사전투표율이 역대 지방선거 중 가장 높은 23.5%(대구 18.6%, 경북 22.4%)를 기록하며 뜨거운 열기를 보이는 듯하지만, 막상 유권자들의 속내는 복잡하고 무거워 보이기만 한다. 이번 선거 역시 과거와 마찬가지 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지역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지방 발전 전략보다는 중앙 정치의 대리전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당의 '내란 척결'과 야당의 '독재 저지'라는 거대 프레임이 맞부딪치면서 지방선거 본연의 의미는 크게 퇴색(退色)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국의 선거판이 혼탁함 그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양대 후보들은 초박빙 접전 속에서도 불필요한 비방을 자제하고 정책 대결을 펼치려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두 후보는 상호 정책과 능력 검증 외에 불필요한 인신공격이나 과거 이력에 관한 비방은 하지 않는 '네거티브 제로'(negative zero) 선거 기조를 끝까지 유지했다. 특히 김부겸 후보의 경우 선거 중 공식 석상에서 '내란'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이제 선거의 명암을 가를 핵심 변수는 이쪽도 저쪽도 다 싫다는 정치 무관심층의 향방이다. 이들의 마음을 돌려 투표소로 발을 향하게 하고, 비록 내 마음에 쏙 드는 '최상의 후보'가 없을지라도 반드시 돼서는 안 될 최악의 후보를 골라내는 것만으로도 투표의 의미를 갖게 만드는 일이다. 일각에서 나타나는 정치 혐오의 분위기가 투표마저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독려(督勵)하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1인 1표'의 동등한 투표권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1913년 영국의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은 여성 참정권을 외치며 달리는 국왕의 말 앞에 자신을 던졌고, 무산 노동자들은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이라는 격랑을 거쳐 선거권을 쟁취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기까지 150년이 걸렸으며, 미국의 흑인들은 1965년 '피의 일요일' 유혈 참극과 같은 수많은 희생을 치른 후에야 참정권을 실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자치 규정이 제헌 헌법에도 포함돼 있었지만 6·25전쟁과 5·16 군사 정변으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995년에야 자치단체장을 직선으로 뽑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질 만큼 역사적 부침(浮沈)을 겪었다. 최선이 없다면 차악(次惡)이라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숙명이다. 귀중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차악을 택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과 지역, 그리고 나라의 발전을 지키는 최소한의 보루(堡壘)다.
2026-06-03 05:00:00
올해 들어 취업 문턱을 한 번도 넘어 보지 못한 15~29세 청년층 수가 1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1일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올해 1~4월 청년층 취업 무경험 실업자 수는 5만6천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4%나 급증했다. 취업 경험이 전혀 없는 실업자 증가 규모가 1만 명을 넘어선 것은 2016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일자리 생태계의 가장 아랫단이자 미래 동력(動力)이 되어야 할 청년층이 노동시장 진입 단계부터 구조적으로 차단당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위험한 신호다. 이 같은 '청년 취업 잔혹사'의 배경에는 인공지능(AI) 전환에 따른 고용 대체 영향이 크다. 그동안 사회 초년생들의 주요 진입로였던 데이터 분석 등 '로(low) 레벨 화이트칼라' 직군이 AI로 빠르게 대체되면서 기업들의 신규 채용 필요성이 급감한 탓이다. 실제로 AI 도입률이 타 직군에 비해 높은 정보통신업, 금융·보험업, 제조업 등에서 고용 둔화가 두드러지고 있으며, 전문과학 및 기술서비스업 취업자는 5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혁신의 그늘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가장 먼저 삼키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고용시장이 경력직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취업 경험 자체가 없는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아예 사장(死藏)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최근 AI 특수를 누리는 대기업 노조들이 사측에 과도한 이익 분배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키우는 것도 신규 고용 위축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기업의 이윤이 업황 둔화에 대비한 미래 연구나 신규 인력 투자 대신 성과급 잔치로 흘러간다면, 청년 구직난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벌써 AI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임계점(臨界點)을 넘어 극단적인 폭력과 반기술 정서로 번지고 있다. 기술의 잠재력을 역설하던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의 대학 졸업식 연설에 청중의 야유가 쏟아졌고, 데이터센터 건립을 승인한 시의원의 자택에 총격이 가해졌다. 급기야 오픈AI CEO 샘 올트먼의 자택에 화염병이 투척되고 총격 사건까지 발생하며 현대판 'AI 러다이트(기계 파괴) 운동'이 현실화되는 양상이다. 이는 결코 남의 나라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고용 절벽에 내몰린 우리 청년들의 좌절감이 언제 어떻게 터져 나올지 우려스럽다.
2026-06-02 05:00:00
'AI 슬롭(AI Slop)'은 클릭 수를 노리고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대량 생산된 글, 이미지, 영상 등 저품질 디지털 콘텐츠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멸칭이다. 의미·완성도가 낮고 스팸처럼 유통되는 AI 슬롭은 우리 일상을 전방위로 잠식하고 있다. 이런 AI 슬롭에 이념적 편향성까지 더해지면 그 폭발력은 몇 배 더 가중된다. 최근 신문 기사를 모방한 합성물로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貶毁)한 5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여성은 1980년 5월 20일 자 일간지 기사인 척 교묘하게 합성한 게시물을 통해 5·18이 북한 간첩의 소행이라는 허위 내용을 유포했는데, 이 이미지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마케팅이 정치권의 논란이 되자 모 국회의원은 드럼통 모양의 텀블러를 소개하는 AI 합성 사진을 공유했다가 가짜라는 지적이 나오자 급히 삭제하기도 했다. 드럼통은 극우 누리꾼들이 이재명 대통령을 비하(卑下)할 때 사용한다. 대한민국의 AI 슬롭 소비는 외신마저 주목할 정도다. 한국 사회에서 생성형 AI가 빠르게 대중화되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열흘 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실재감 결핍: 한국은 어떻게 AI에 대한 현실 감각을 잃었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기술 확산 속도에 비해 사회적 안전장치는 뒤처지고 있다고 매섭게 꼬집었다. SCMP가 대표 사례로 꼽은 건 최근 조회수 1천500만 회를 넘기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달군, 이른바 '야구장 여신' 영상이었는데 AI로 만들어진 가짜로 드러났다. AI 생성물이 재미를 넘어 공공 안전까지 흔든 사례도 있다. 지난 4월 대전 오월드 늑대 탈출 소동 당시, 생성형 AI로 교묘하게 합성된 '학교 앞 교차로의 늑대' 사진은 재난 당국이 이를 진짜로 판단하고 주민 대피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화면에 떠오른 자극적인 이미지가 나의 정치적 신념이나 문화적 욕망을 완벽하게 자극할 때, 그것이 나를 낚기 위해 던져진 'AI 슬롭'은 아닌지 반드시 한번 의심해 봐야 한다. 주체적으로 판단해 미디어를 소비하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이 시급한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2026-05-27 05:00:00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월가에 타코(TACO)와 나초(NACHO), 살사(SALSA) 등 멕시코 음식 이름을 딴 신조어들이 범람(汎濫)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중국을 방문했으나 이란 전쟁의 실타래를 풀 만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자, 실망과 조롱이 뒤섞인 시장의 냉소(冷笑)가 언어의 탈을 쓰고 빠르게 확산하는 중이다. 미 경제 매체 벤징가가 맥쿼리그룹의 전략가 티에리 위즈먼의 분석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최근 월가에서는 '증시가 오르면 공격한다(Stocks Are Lifting, So Attack)'는 이른바 '살사(SALSA)' 시나리오가 급부상하고 있다. 뉴욕 증시가 견조(堅調)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행동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덜 느끼며 이란에 대한 공격 수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는 불과 얼마 전까지 월가를 지배했던 '타코(TACO·Trump Always Chickens Out, 트럼프는 항상 겁먹고 물러난다)'의 완벽한 반대 개념이다. 시장은 그간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리 거친 전쟁 불사론을 쏟아내더라도 막상 금융시장이 요동치면 결국 한발 물러설 것이라는 일종의 '학습된 기대'를 품어왔다. 그러나 전쟁 발발 3개월이 지난 지금, 이란발 불확실성 속에서도 뉴욕 증시가 굳건히 버텨내자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도리어 군사적 폭주를 감행할 정치적 엄호막이자 여유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 것이다. 살사 도박 시나리오의 이면에는 시장을 송두리째 뒤흔들 '나초(NACHO·Not A Chance Hormuz Opens,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릴 가능성은 없다)'의 공포가 숨어 있다. 원유 수송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封鎖)가 장기화할 경우,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에서 최고 200달러까지 폭등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은 세계 경제를 전례 없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월가에 등장한 자극적인 신조어들은 오늘날 글로벌 금융시장이 지정학적 리스크와 얼마나 불안하게 동거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외교적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지금,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이성으로 호르무즈의 파고(波高)를 주시해야 할 때다.
2026-05-20 05:00:00
'구독경제(Subscription Economy)'는 최근 몇 년 사이 소비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일정 구독료를 지불하고 정기적으로 제품을 제공받거나 콘텐츠 등을 이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OTT 구독 등을 넘어 영양제, 강아지 장난감, 화장품, 책, 술, 작품, 의류, 꽃, 이모티콘 등 각종 서비스로 확대돼 일상생활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가전 시장도 이미 구독으로 시장이 재편된 지 오래다. '소유'에서 '경험'으로 개념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 11일 전기차 대중화의 최대 문턱이었던 초기 구매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터리 구독 서비스'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차량 가격의 약 40%를 차지하는 배터리값을 초기 비용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규제를 철폐(撤廢)해 소비자는 차체만 구매하고 배터리는 매달 사용료를 내는 리스 방식을 택함으로써 내연기관차 수준의 가격으로 전기차를 소유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구독경제'를 전기차에 도입함으로써 친환경 모빌리티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하지만 제도 도입에 따른 장밋빛 전망 못지않게 소비자가 짊어질 장기적 비용 부담과 법적 회색지대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아 보다 치밀한 후속 대책이 요구된다. 특히 '구독'이라는 편리함 뒤에 숨은 경제적 함정(陷穽)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리스료에는 배터리 원금뿐 아니라 이자와 사업자의 마진이 포함되기 때문에 차량을 장기간 운행할 경우 매달 지불하는 구독료 총액이 배터리를 직접 구매했을 때의 비용을 상회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소유권 분리에 따른 복잡한 권리관계도 풀어야 할 숙제다. 차체와 배터리의 손해 책임 주체가 달라지면 보험료 산출과 보상 과정에서 소비자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 또 중고차 거래 시 배터리 리스 계약 승계 문제 등 기존에는 없던 번거로운 변수들도 생겨난다.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친환경 차로의 전환 속도를 가속해 줄 배터리 구독 서비스가 '조기 안착'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세심한 제도 설계와 업계의 합리적인 서비스 모델 제시가 필수적이다. 이번 실증 사업이 대한민국이 미래 모빌리티 시장을 선점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6-05-13 05:00:00
[세풍-한윤조] '분만실 뺑뺑이' 없게 분만 인프라 지켜야
저출산의 오랜 터널 끝에 빛이 보이는 듯하다. 합계출산율 0.72명으로 인구절벽을 넘어 국가 존폐를 걱정해야 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지난해부터 합계출산율이 14개월 연속 상승 흐름을 이어가며 저출산 국면에 변화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올 2월 출생아 수는 2만2천898명, 합계출산율은 0.93명으로 집계되면서 아이 낳겠다는 의지가 살아나는 것인지 조심스러운 희망도 엿보인다. 그러나 의료 현장의 시계는 거꾸로다. 정작 아이 낳을 병원과 아픈 아이를 데려갈 소아·청소년과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5년 사이 산부인과 275곳, 소아청소년과 662곳이 문을 닫았다. 지난해 188명이었던 산부인과 레지던트는 올해 단 1명에 그쳤다. 당장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분만실 뺑뺑이' 사건만 봐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최근 청주의 30대 임신부가 응급 분만 병원을 찾지 못해 부산의 한 종합병원으로 뒤늦게 이송됐으나 결국 29주 된 태아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2월 말 대구에서 가 119 신고 4시간 만에 경기 분당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쌍둥이 중 한 명이 숨진 지 두 달 만에 또다시 비슷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지난 1일 청주의 한 산부인과에서는 산모의 출혈로 태아의 심박수가 급격히 떨어지는 긴급 상황이 벌어져 인근 상급종합병원 6곳에 이송 가능 여부를 타진했지만, 전문의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19는 전국 단위 수배로 전환해 전국 41개 의료기관을 수소문한 끝에 산모는 3시간 30분 만에 소방 헬기를 통해 부산까지 이송됐다. 하지만 산모는 무사했으나 태아는 끝내 숨을 거뒀다. 지난 2월 말에도 대구에서 조산(早産) 증세를 보였던 28주 차 쌍둥이 임신부가 대형 병원 7곳으로부터 수용을 거부당하다 신고 4시간 만에 분당서울대병원까지 이송돼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 1명은 태어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저산소증으로 숨졌고, 다른 1명은 뇌 손상을 입어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재작년 추석 연휴에는 25주 차 임신부가 병원 75곳에 무려 187통의 전화를 돌린 뒤에야 받아주겠다는 산부인과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8시간 반 동안의 응급실 뺑뺑이였다. 지역에서의 필수 의료 공백은 이미 '사망 선고'라 불릴 만큼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최근 들어 고령 산모와 조기 출산, 다태아(多胎兒) 출산 등 고위험 분만이 늘고 있는데 분만 전문 산과 전문의, 신생아 전문의는 턱없이 부족해진 지 오래다. 2020년 기준 전국 산부인과 전문의 5천900여 명 중 실제 분만을 담당하는 비율은 8~15% 수준인 데다, 특히 고위험 분만을 담당하는 의사는 그중에도 10~20% 수준으로 약 80~120명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저출생 극복을 외치면서 정작 임신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스템이 불안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장기적으로는 적정 규모의 전문의 확보가 필수적이겠지만 당장 확충이 어렵다면 있는 인력이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역 단위 '실시간 응급 이송 핫라인'과 광역 네트워크 구축이 시급하다. 필수 의료를 기피하는 의료계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책임에 비해 보상이 낮은 데다, 의료 사고 발생 시 민형사상 책임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 의료진을 보호하는 형사 처벌 면책(免責) 범위의 현실화에 대해서도 정부는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2026-05-06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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