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조 논설위원 hanyun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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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고부-한윤조] 명성과 공직의 엄정함

    [야고부-한윤조] 명성과 공직의 엄정함

    역사학자이자 미술사학자로서 유홍준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은 남다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전국 구석구석의 유물을 대중의 언어로 풀어내며 '우리 문화유산 대중화'의 이정표를 세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다루는 학자로서의 탁월함과 국가의 문화 자산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로서의 엄정함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최근 발생한 검증 부실과 이해충돌 논란, 그리고 이에 따른 유 관장의 사의 표명은 공공기관의 수장이 가져야 할 '공사(公私)의 경계'와 '책임 의식'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다시금 환기한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전시품 오기(誤記) 해프닝이 아니다. 5만원에 구입한 개인 소장 유묵을 제대로 된 전문가 감정도 없이 14일 만에 국가 박물관의 특별전에 올린 과정은, 공적 시스템보다 기관장의 개인적 '직관'과 '권위'가 앞섰음을 보여준다. 서예사 전공자라는 자부심이 전문가 집단의 객관적 검증 절차를 뛰어넘는 순간, 친일파의 글씨가 애국지사의 유묵으로 탈바꿈하는 치명적인 오류로 이어졌다. 더욱 아쉬운 대목은 논란 이후의 대응 방식이다. 오류가 발견되었을 때 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정작 해당 유물이 관장 개인의 소장품이라는 사실은 은폐됐다. 자랑처럼 보일까 봐, 혹은 학자로서 부끄러워서 밝히지 못했다는 해명은 대중의 신뢰를 먹고사는 공공기관장의 자세로는 대단히 미흡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을 기회를 스스로 놓치면서, 박물관 연구진이 피땀 흘려 쌓아 올린 신뢰마저 한순간에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돌아보면 유 관장의 공직 잔혹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 문화재청장 시절 발생했던 저서 공적 구매 논란, 낙산사 동종 명기 논란, 숭례문 화재 당시의 관리 책임 등 공적 업무와 개인적 성과·저술 활동 간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며 숱한 구설에 올랐고, 중도 사퇴라는 결말을 맞이하게 됐다. 학자의 개인적 통찰과 권위가 공적 시스템의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압도할 때, 그 조직은 반드시 윤리적·절차적 리스크에 직면하게 된다. 공직에서의 이해충돌 방지와 엄격한 절차 준수는 형식적 행정이 아니라, 조직과 개인 모두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hanyunjo@imaeil.com

    2026-10-22 05:00:00

  • [세풍-한윤조] 명찰만 바뀐 '소방 국가직' 6년

    [세풍-한윤조] 명찰만 바뀐 '소방 국가직' 6년

    소방공무원의 신분이 지방직에서 국가직으로 전환된 지 6년이 흘렀다. 당시 정부와 여야는 지역 간 소방 인력·장비 격차를 해소하고 소방 서비스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다. 그러나 최근 경기 부천 화재 현장에서 안타깝게 순직한 고(故) 김진석 소방위의 영결식이 치러진 지금, 현장 소방관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국가직이 됐어도 바뀐 것은 명찰 속 '지방'이라는 글자가 빠진 것뿐"이라는 그들의 울분 섞인 목소리는 국가가 소방관들에게 해온 약속이 얼마나 허울뿐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같은 비극과 현장의 파행은 신분만 국가직일 뿐, 재정 부담은 지자체에 덮어씌운 기형적인 예산 구조에서 비롯된 예고된 인재(人災)다. 올해 전국 소방 예산 8조5천967억원 중 지자체가 부담하는 몫은 무려 89.3%(7조6천728억원)에 달하는 반면, 국가 지원은 10.7% 남짓에 불과하다. 특히 전국 소방공무원 인건비 6조5천129억원 가운데 국비 지원액은 8.4%에 그쳐 급여의 91.6%를 지방정부가 메우고 있다. 2017년부터 정부 주도로 2만여 명을 충원했지만 인건비 폭증은 온전히 지자체의 짐으로 남았다. 학계 분석상 국가적 책임이 있는 사무가 66%에 달함에도 실제 국비 지원액은 2021년 9천947억원에서 올해 9천239억원으로 오히려 줄어드는 거꾸로 행정이 펼쳐지고 있다. 전체 예산이 국비로 충당되는 경찰과 달리, 소방은 여전히 지자체 재정 상태에 목을 매는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다. 그 결과는 지역 간 치명적인 소방 격차와 안전 공백(空白)으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소방관 1인당 연간 출동 횟수가 99건으로 전국 최고 수준인 경기도의 경우, 올해 소방 예산 1조5천655억원 중 인건비 비중이 74%까지 치솟자 결국 재정난을 이유로 노후 소방차 교체 예산 26억5천만원과 순직 소방관 추모 행사비마저 전액 삭감했다. '민생 복지 사업'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국민과 소방관의 생명이 걸린 장비 예산을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어낸 것이다. 소방관 1인당 보호 장비 예산이 부산(40만원)과 인천(367만원) 간에 무려 9배 차이가 나는 현실은 "지역별로 소방관 목숨값이 다르냐"는 탄식(歎息)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현장의 여건 또한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생명줄과 다름없는 랜턴은 예산 부족으로 교체 주기를 넘겨 불조차 들어오지 않고, 법정 사용 연한이 지나도 성능 검사만 통과하면 계속 쓰게 한 규정은 '바퀴가 빠질 때까지 타라'는 식의 절감 핑계로 악용된다. 기준 인원의 절반 수준으로 출동해 펌프차에 한두 명이 겨우 탑승하는 인력난 속에서 한 달 초과 근무가 80~90시간에 달하지만, 절차가 복잡해 인력 충원조차 쉽지 않다. 여기에 현장 경험이 부족한 지휘부의 비체계적인 대응과 악성 민원 폭주까지 더해져 대원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방관의 희생 앞에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미사여구(美辭麗句)만 되풀이하는 립서비스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부와 국회는 국가가 소방 재정을 책임지도록 예산 분담 구조를 근본적으로 다시 짜야 한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처럼 국세의 일정 비율을 소방 재원으로 안배하거나, 인건비와 장비 구입비의 분담 체계를 개편하여 안정적인 국비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국가가 제 역할을 다하고 제대로 된 자금을 투입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안타까운 희생을 막을 길은 없다.

    2026-10-21 05:00:00

  • [야고부-한윤조] CXMT 쇼크

    [야고부-한윤조] CXMT 쇼크

    지난 13일 코스피가 하루 만에 5% 넘게 주저앉으며 6천 선 아래로 붕괴했다. 외국인 매물 폭탄의 90% 이상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주식에 집중됐다. 시장을 흔든 결정적 뇌관은 중국 최대 메모리 기업 창신메모리(CXMT)의 '4F²(스퀘어) 차세대 D램 개발' 및 연내 서버용 DDR5 모듈 출시 발표였다. 단순한 기술 발표 하나가 어떻게 한국 증시 전체의 시가총액 수백조원을 증발시키는 파장을 불러왔을까.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지배해 온 공식은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통한 회로 미세화'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첨단 미세공정 기술을 바탕으로 초격차를 유지해 왔다. 반면 미·중 갈등의 여파로 EUV 장비 수입이 전면 차단된 중국 반도체 업계는 사실상 도태될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CXMT가 던진 '4F² 수직 구조' 카드는 미세화의 한계를 아키텍처(구조) 혁신으로 극복하겠다는 선언이다. 미국의 첨단 장비 제재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히자, 중국이 물리적 한계를 우회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더욱 중대한 위협은 CXMT가 범용(Legacy) D램 수준에 머물지 않고, 고부가 영역인 '서버용 DDR5 (RDIMM)'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는 점이다. 데이터센터와 AI 서버 시장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이익을 떠받치는 가장 견고한 보루이자 핵심 수익원이다. 만약 CXMT의 4F² 서버용 메모리가 시제품 단계를 넘어 시장 출하에 성공하고 수율을 확보한다면, 이는 글로벌 D램 공급 과잉과 단위당 단가 하락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AI 투자 수익성에 대한 의문과 반도체 피크아웃(정점 통과) 우려로 불안해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중국의 서버 시장 침투 소식은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물론 CXMT의 이번 발표를 온전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제 상용화 시점'보다 '중국 반도체 추격의 속도와 방향'이다. 'CXMT 쇼크'는 K-반도체에 분명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기술의 진입장벽을 한 차원 더 높이는 '진짜 초격차'를 재정립하고 초응전 자세로 임하지 않는다면, 반도체 선도국의 지위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hanyunjo@imaeil.com

    2026-10-15 05:00:00

  • [야고부-한윤조] 주거 욕망의 지형

    [야고부-한윤조] 주거 욕망의 지형

    국제 해비타트의 '집, 그 대가는 무엇인가?(Home at What Cost?)' 보고서는 한국 사회의 주거 불안과 욕망의 지형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한국 무주택자의 38%가 평생 내 집 마련이 어려울 것이라고 응답한 현실은 글로벌 평균(23%)을 훨씬 뛰어넘는다. 캐나다(56%), 호주(52%), 미국(42%) 등 고소득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암담함은, 집이 더 이상 거주의 기본권이 아닌 자산 격차를 극명히 가르는 거대한 진입장벽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한국인이 주거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은 요소다. 글로벌 평균이 '안전감(40%)'을 1순위로 꼽은 반면, 한국인의 53%는 '충분한 공간과 사생활 보호(프라이버시)'를 선택했다. 치안과 상하수도 같은 인프라가 비교적 잘 갖춰진 사회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외부 위협을 막는 1차적 방어를 넘어 개인의 독립성과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나만의 정서적 안전지대'로 옮겨간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야말로 한국인이 갈망하는 진정한 주거의 조건인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주거비 부담이 삶의 기본적 조건을 옥죄는 방식은 전 세계가 닮아 있다. 응답자의 75%가 주거비를 감당하기 위해 식비, 의료비, 교육비 등 필수 지출을 줄였다고 밝혔다. 특히 미래를 일궈가야 할 청년세대의 아픔은 더욱 깊다. 주거비 부담 때문에 가족을 꾸리기 어렵다는 응답이 MZ세대(18~45세)에서 62%에 달한다는 사실은, 주거 문제가 개별 가구의 고통을 넘어 사회의 재생산 구조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의미다. 전 세계 응답자의 절반 이상(56%), 한국인의 47%가 자국의 주거 시스템이 고장 났다고 인식한다. 집이 삶의 안식처가 아닌 미래를 압박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할 수 없다. 조너선 렉퍼드 해비타트 CEO의 지적처럼, 집이 제공해야 할 기본적 가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채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는 미래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생활이 보장되는 충분한 공간을 원하고, 주거 부담 없이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사회. 고장 난 주거 시스템을 수리하는 일은 바로 그 당연한 삶의 기대를 복원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2026-10-08 05:00:00

  • [야고부-한윤조] 메타 뮤즈

    [야고부-한윤조] 메타 뮤즈

    "난 평범한 비서가 아니라, 네 개인 에이전트야." 아직까지 한국 공식 서비스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최근 온라인을 통해 화제가 되며서 인터넷 우회 접속(VPN)으로 미국 메타의 인공지능(AI) 에이전트 서비스 '뮤즈(Muse)'를 접해본 국내 이용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유창한 한국어 인사다. 출시 보름 만에 미국 양대 앱 마켓 무료 앱 1위를 싹쓸이한 뮤즈 신드롬이 한국 시장까지 거세게 일고 있다. 뮤즈가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 이유는 단순히 '묻고 답하는' 챗봇의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지메일, 캘린더, 구글 드라이브 등 개인 데이터와 연동해 놓친 일정을 짚어주고, 해외 쇼핑몰의 최고 할인율을 비교해 주며, 안 쓰는 구독 서비스를 알아서 해지해준다. 미국에서는 "내 돈을 찾아줘"라는 한마디에 은행 미청구 자금이나 주 정부 환급금 수천 달러를 받아냈다는 후기가 연일 화제다. 더 무서운 점은 메타의 파격적인 무료 보급 전략이다. 사용자별로 클라우드 전용 컴퓨터를 제공해 스마트폰을 꺼둬도 AI가 알아서 업무를 처리하며, 매주 10만원이 넘는 가치의 토큰을 무료로 지급한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의 의도는 명확하다. 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 광고 수익 중심의 체질에서 벗어나, 뮤즈가 성사시키는 상거래 수수료를 새로운 수익원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노스이스턴대를 중퇴한 23세 청년이 만든 AI 비서 '인스팅트(Instinct)' 역시 왓츠앱 메신저를 기반으로 사용자의 맥락을 귀신같이 파악해내며 입소문을 타고 있다. 이러한 해외 AI 에이전트들의 파상 공세는 국내 빅테크 공룡인 네이버와 카카오에 커다란 경고음을 울린다. 두 기업 모두 '전 국민 AI 비서'를 내걸며 생태계 주도권을 호언장담했으나, 수년째 시장의 기대에 미치는 뚜렷한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뮤즈나 인스팅트처럼 이용자의 실제 '삶과 주머니'를 챙겨주는 실행형 에이전트와는 격차가 크다. AI로 인해 언어의 장벽마저 허물어진 지금, 뮤즈가 한국 시장에 정식 상륙한다면 국내 플랫폼들의 입지는 순식간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우리 IT 기업들은 과연 어떻게 맞설 것인가? 더 이상 머뭇거릴 골든타임이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

    2026-10-01 05:00:00

  • [야고부-한윤조] '혼놀'에 빠진 사람들

    [야고부-한윤조] '혼놀'에 빠진 사람들

    여가 활동의 주 동반자로 '혼자'를 선택한 비율이 절반을 뛰어넘어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인다. 식사와 영화 관람을 넘어 여행, 전시, 공연, 페스티벌로까지 '혼놀(혼자 놀기)'의 영역은 확장하는 추세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가장 많이 참여한 여가 활동의 주 동반자로 '혼자'를 꼽은 비율은 56.6%로 전년보다 1.7%포인트 상승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취향과 속도에 집중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홀로 즐기는 여가는 일시적 유행을 넘어 하나의 견고한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현상의 바탕에는 집단보다 개별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존재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피로감을 줄이고, 불필요한 감정 소비나 일정을 조율하는 수고 없이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내리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결과다.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만큼 머무는 자유로움은 현대인에게 타인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의 기준에 삶을 맞추는 경험이다. 역설적이게도 혼놀 문화의 확산은 초연결사회의 특성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상시 연결된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는 소통과 관계 유지로 인해 심리적 과부하(過負荷)를 겪는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타인과의 연결을 잠시 차단하고 지친 정서를 회복하려는 일종의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물리적으로 혼자 있더라도 언제든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거나 정보를 공유할 수 있기에, 혼자라는 상태가 주는 고립감이나 불안이 대폭 감소한 점도 원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혼놀 문화가 지닌 그늘도 간과할 수는 없다. 사회적 유대감이 약화하고, 장기적으로는 비자발적 고립으로 이어질 위험이 존재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거절이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홀로 있음을 선택하는 일이 반복되면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능력 자체가 퇴화(退化)할 수 있다. 결국 혼놀은 과중된 관계의 짐을 덜어내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기 위한 균형 잡기라 볼 수 있다. 고립에 빠지지 않는 선에서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과잉 연결된 현대 사회를 건강하게 살아가는 유용한 처세(處世)가 된다.

    2026-09-24 05:00:00

  • [세풍-한윤조] 韓 점령한 中 전기차, 국내생산세액공제 시급하다

    [세풍-한윤조] 韓 점령한 中 전기차, 국내생산세액공제 시급하다

    "전기차 산업이 흔들리면 철강과 배터리, 부품 산업은 물론 로봇과 피지컬 인공지능(AI)으로 이어지는 제조업 생태계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나온 이 경고는 대한민국 제조업의 뿌리를 흔드는 거대한 위기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내 시장을 겨냥한 중국산 전기차의 공세(攻勢)가 가파른 상황에서, 우리의 전기차 생산 기반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모빌리티는 물론 전후방 연관 산업 전체가 연쇄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절박한 목소리다. 실제로 국내 도로 위의 풍경은 급격히 바뀌고 있다. 올해 1분기 국내에 신규 등록된 전기 승용차 10대 중 약 4대가 중국산일 정도로 침투(浸透) 속도가 무섭다. 과거 테슬라의 중국 공장 물량이 주를 이루던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BYD를 필두로 지커, 샤오펑, 체리자동차 등 중국 자체 브랜드가 파격적인 가격표를 내걸고 한국 안방을 직격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캐나다는 100%가 넘는 관세 폭탄을 터뜨렸고, 유럽연합 역시 징벌적 추가 관세를 얹으며 장벽을 단단히 쌓았다. 거대 선진 시장의 빗장에 막힌 중국 전기차에 수입 장벽이 느슨한 한국은 가장 '만만한 상륙(上陸) 거점'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유일한 방어막이어야 할 정책적 지원이 정작 안방의 생산 기반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발표한 세제개편안에 따르면 반도체, 2차전지, AI 로봇 부품 등 6개 전략산업 품목을 국내에서 생산할 경우 세금을 깎아주는 '국내생산세액공제(한국판 IRA)'가 신설된다. 그러나 정작 가장 시급한 '전기차 완성차'는 구매 보조금과의 중복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생산지를 따지지 않고 지급되는 현행 구매 보조금 제도는 역설적이게도 국내 생산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독(毒)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에서 생산된 테슬라나 BYD 차량이 한국 정부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가격 경쟁력을 더 단단히 굳히는 동안, 정작 국내 완성차 업체들의 국내 생산 기반은 역차별 속에 위축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해외에서 생산하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 유리해진다면, 국내 고용과 부가가치 창출, 소재·부품 수요는 둔화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 국회에서는 진영을 넘어 전기차를 생산세액공제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급속도로 형성되고 있다. 국내에서 생산한 전기차에 대해 대당 최대 400만 원 수준의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발의되는 등 여야 모두 입법 추진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산업통상부 관계자가 지적했듯, 과거 한국 시장에서 중국산 점유율이 38%에서 95%까지 팽창하며 국내 생태계가 사실상 와해했던 '태양광 산업의 비극'을 전기차에서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전기차는 단순히 이동 수단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배터리, 철강, 전장 부품, 그리고 미래의 AI 로봇으로 이어지는 국가 첨단 제조업의 핵심 고리다. 세계 주요국이 자국 내 생산 기지를 사수(死守)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쏟아붓는 시대다. 세수 감소나 중복 지원이라는 미시적인 논리에 갇혀 완제품 전기차를 방치하는 것은 국가 산업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국회 세제개편안 심사 과정에서 전기차를 국내생산세액공제 대상에 반드시 포함하는 과감하고 신속한 결단이 내려져야 할 시점이다.

    2026-09-23 05:00:00

  • [야고부-한윤조] 야차룰

    [야고부-한윤조] 야차룰

    최근 규칙과 보호 장구도 없이 맨몸으로 맞붙는 이른바 '야차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당사자 간 합의만 있으면 다쳐도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잘못된 소문이 SNS와 유튜브를 타고 빠르게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차룰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 인기를 끌면서 상대를 더 많이 때린 쪽이 오히려 영웅시되는 왜곡된 현상까지 나타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싸우는 장면을 촬영해 유포하거나 판매하는 사례까지 확인된다. 급기야 최근 청주에서는 20대 여성이 강요된 야차룰 격투 끝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아파트 동대표 간 각서를 쓰고 벌인 몸싸움이 사망 사건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착각의 배경에는 싸움 전 작성한 '이의 제기 불가' 각서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잘못 인식하는 탓도 있다. 형법 제24조가 규정하는 '피해자의 승낙'은 사회상규(社會常規)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된다. 상해죄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가 아니므로 사전 합의가 형사 책임 면제의 사유가 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곳은 학교 현장이다. 청소년 사이에서 야차룰은 일종의 놀이 문화처럼 포장돼 학교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지하 주차장이나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격투는 동료 학생들의 방관과 영상 촬영·유포로 이어지며 피해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유행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교육부의 '2026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폭 피해 응답률은 2.9%로 2013년 전수 조사 도입 이래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신체 폭력(15.7%)과 집단따돌림(17.1%) 비중이 늘었고, 피해 발생 장소의 70%가 교실과 운동장 등 학교 내였다. 경찰청과 교육부가 '야차룰'을 신종 학교폭력 유형으로 규정하고 경보를 발령했지만, 이보다는 폭력을 유희로 착각하게 만드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 선행(先行)돼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학교전담경찰관(SPO)을 통한 예방 교육 강화는 물론, 자극적인 격투 영상 차단을 위해 디지털 플랫폼과의 공조 체계를 조속히 구축하고, 강요된 신체 폭력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모니터링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

    2026-09-14 05:00:00

  • [야고부-한윤조] 랩 다이아몬드의 급부상

    [야고부-한윤조] 랩 다이아몬드의 급부상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가장 좋은 친구(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라는 노래 가사처럼 수백만 년 동안 땅속 깊은 곳에서 고온과 고압을 견뎌낸 천연 다이아몬드는 변하지 않는 사랑과 부(富)의 절대적 상징으로 군림해 왔다. 그런데 실험실에서 배양된 '랩그로운(Lab-Grown) 다이아몬드'(일명 랩 다이아)가 실용과 가치를 내세워 시장을 잠식하면서, 영원한 가치를 자랑하던 천연 다이아몬드의 위상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랩 다이아는 천연석과 물리적·화학적·광학적으로 완전히 동일함에도 가격은 70~90%가량 저렴한 데다, 미관상 육안(肉眼)으로 구분조차 불가능하다. 당연히 소비자가 굳이 비싼 천연석을 고집할 이유가 사라졌다. 웨딩 시장에서는 이미 과반의 커플이 랩 다이아 약혼반지를 선택하고 있고, 패션 주얼리와 일상 장신구 영역까지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이 파괴적 혁신은 한 세기 넘게 글로벌 시장에 군림해 온 다이아몬드 원석 가격을 고점 대비 35% 이상 폭락시켰고, 자원 의존도가 높았던 아프리카 국가들을 경제적 어려움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재정의 상당 부분을 다이아몬드 수출에 의존해 온 보츠와나는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되고 마이너스 성장의 늪에 빠졌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현지 광산들이 잇따라 가동을 멈췄다. 그러나 이 거센 파고의 반대편에서는 뜻밖의 기술 혁명이 피어나고 있다. 보석 시장에서 폭발한 랩 다이아 수요는 화학 기상 증착(CVD) 등 합성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견인(牽引)했고, 이는 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바꿀 핵심 소재로 부상한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실용화된 어떤 물질보다 열전도율이 높고 고전압 및 방사선에 강해, AI 데이터센터의 열 관리와 차세대 6G 통신, 우주·국방용 전력 반도체의 '꿈의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소비자가 더 크고 화려한 보석을 갈망하던 욕망이 차세대 첨단 산업의 기술적 난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열쇠가 된 셈이다. 한국 역시 대기압 상태에서의 다이아몬드 합성 기술과 단결정 웨이퍼 트랜지스터 구현 등 기초 연구에서 성과를 내며 대열에 합류했다. 영원할 것 같던 천연 다이아몬드의 몰락(沒落)은 전통 산업의 종말을 고하는 경고음인 동시에, 기술 혁신이 가져온 새로운 산업 지평을 보여준다. 한윤조 논설위원 hanyunjo@imaeil.com

    2026-09-10 05:00:00

  • [야고부-한윤조] 외국인도 반한 K세신

    [야고부-한윤조] 외국인도 반한 K세신

    어릴 때 주말이면 온 가족이 목욕 바구니를 들고 대중목욕탕(大衆沐浴湯)을 갔었다. 아빠와 동생은 남탕으로, 엄마와 나는 여탕으로 각자 찢어졌다가 목욕이 끝난 뒤 요구르트를 하나씩 손에 쥐고 다시 만나곤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대중목욕탕의 추억으로 치부되던 '목욕'이, 가장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힐링 라이프스타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고 한다. 남대문 시장에 때를 미는 때 타월과 발 각질 제거기를 사기 위해 2030세대와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특히 한국 여행의 첫 코스로 '1인 세신(洗身)숍'을 찾아 때를 밀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소셜미디어 인증 글이 넘쳐난다는 이야기는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최근 목욕 문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생소한 풍경은 오늘날 소비 트렌드의 일면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유쾌한 반전의 중심에는 일상의 평범한 경험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기록·공유하려는 젊은 층의 소비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젠지(Gen Z)와 밀레니얼 세대에게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 위생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시장의 아날로그적 정취 속에서 형형색색의 목욕용품을 직접 만져보고 상인과 담소를 나누며 물건을 사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젊은 층에게 특별한 '체험형 콘텐츠'다. 사우나나 세신을 통해 일상의 스트레스를 씻어내는 과정 역시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힐링이자 자아 정화의 리추얼(Ritual)로 승화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목욕 문화의 재발견이 국경을 넘어 글로벌 관광 트렌드로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특유의 세신 문화는 타인에게 알몸을 노출하기 꺼리는 외국인들의 문화적 장벽과 부딪혀 그간 대중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1인 세신숍'이라는 독립적이고 프라이빗한 공간이 결합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중탕의 낯선 시선은 차단하면서도, 오직 한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K-뷰티·웰니스 체험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목욕이라는 한국인의 일상이 힙(Hip)한 문화적 자산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것을 보니, 결국 오래된 일상재라도 어떠한 경험적 가치와 스토리텔링을 입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시장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 같다.

    2026-09-03 05:00:00

  • [야고부-한윤조] 힙트레디션 탄 전통주

    [야고부-한윤조] 힙트레디션 탄 전통주

    한때 한국인의 술자리를 지배했던 '소맥(소주·맥주)'의 시대가 저물고, 그 자리를 '힙트레디션(Hip Tradition)' 바람을 탄 전통주(傳統酒)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빠른 취기와 폭음으로 대표되던 음주 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대신에 자신이 정성껏 선택한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는 '취향 중심의 음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세청 국세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주류 총출고량은 298만8천㎘로, 1998년 외환위기 이후 27년 만에 300만㎘ 아래로 떨어졌다. 주 52시간 근무제 정착과 회식 축소, 웰니스 라이프스타일 확산이 만든 구조적 변화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전통에 현대적 감각을 입힌 힙트레디션 열풍을 타고 젊은 층의 전통주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편의점 전통주 매출은 5년 전 대비 7배로 뛰었다. 2030세대에게 전통주는 더 이상 어르신들이 제사상이나 명절에만 올리던 고리타분한 술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미적 감각을 드러내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이 된 것이다. 특히 고유의 역사성에 감각적인 패키징, 독특한 풍미가 결합하면서 전통주는 젊은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가장 매력적인 장르로 떠올랐다. 유명 셰프 및 명인들과의 적극적인 협업, 그리고 술과 음료를 다양하게 조합하는 믹솔로지(Mixology) 레시피의 확산 덕분이다. 윤남노 셰프와 협업해 출시된 세븐일레븐의 '복담주'가 단기간에 전통주 카테고리 1위에 오른 사례가 대표적인데, SNS상에서 아이스크림 '폴라포'와 섞어 마시는 이색 레시피가 화제를 모았다. 앞서 히트를 친 '미꿀막(미숫가루꿀막걸리)' '말차막' '윤주막' 등도 차별화된 스토리텔링과 맛으로 젊은 층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다 100년 역사의 옛 양조장을 복원한 '영양 발효공방1991' 사례처럼, 전통주는 공간과 역사를 경험하는 문화 콘텐츠이자 소규모 양조장 제조주의 정수(精髓)로 확장되고 있다. '획일적인 소맥'에서 '개성 있는 전통주'로의 이동은 단순한 주종 변화가 아닌, 나만의 취향과 가치를 증명하려는 주체적인 문화적 소비의 확산이다. 이는 젊은 층이 더 이상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맛과 경험을 즐기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2026-08-27 05:00:00

  • [세풍-한윤조] 보완수사권 없는 경찰 수사의 참화(慘禍)

    [세풍-한윤조] 보완수사권 없는 경찰 수사의 참화(慘禍)

    오는 10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검찰의 보완수사권(補完搜査權)이 사라지게 되자 경찰 조직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堡壘) 역할을 도맡게 됐다. 하지만 가뜩이나 비대한 경찰 조직 내 빈번하던 각종 비리와 비위 사건이 이번 보완수사권 폐지 사태를 계기로 수면 위로 그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국민 사이에서는 '과연 경찰 수사만 믿어선 될까?'라는 의구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민이 경찰 조직에 대한 불신을 보이는 데는 '장미란 씨 실종 암장(暗葬) 사건'과 '광주 여고생 살해범 장윤기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외에도 경찰의 부실 수사로 인해 검찰의 보완수사로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난 일들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제주에서 실종된 30대 여성 장미란 씨는 유족의 애타는 호소 끝에 실종 101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장 씨가 장기 투숙하던 숙소에서 불과 1㎞ 떨어진 곳이었다. 제때 기본적인 수색만 이루어졌더라도 이토록 허망하게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았을 사건이다. 참극의 원인은 충격적이게도 담당 수사관의 '거짓말'과 사건 '암장'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무마된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7월에 신고된 60대 남성 실종 사건 역시 똑같은 수법으로 '셀프 종결' 처리됐고, 해당 남성 또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백골로 발견됐다. 경찰의 형편없는 수사 역량과 자의적인 권한 행사 역시 도를 넘었다. 경찰은 논란이 불거지자, 해당 수사관을 직무 유기 혐의로 긴급체포했으나, 법원은 체포적부심을 인용해 그를 즉시 석방했다. 출근해 근무 중인 피의자를 상대로 체포영장조차 발부받지 않은 채 긴급체포의 법적 요건(형사소송법 제200조의 3)조차 갖추지 못한 중대한 수사 미숙(未熟)을 범한 것이다. 상황 수습에 급급해 기본적인 법률 절차마저 무시하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경찰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비단 제주 사건뿐 아니다. 최근 서울 강남경찰서 수사팀장이 피의자의 인플루언서 남편에게 향응을 받고 그 부인을 참고인으로 둔갑시켜 구속기소 되는가 하면, '광주 여고생 살해범 장윤기 사건'에서는 수사팀이 사건을 축소하고 경찰관인 범인의 부친에게 수사 정보를 넘겨 증거를 인멸(湮滅)하도록 조력한 사실이 드러났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역시 검찰의 보완수사가 없었다면 성범죄 정황 자체가 영원히 묻힐 뻔했다. 이 상태로 10월부터 검찰의 직접 및 보완수사권이 전면 폐지된다면 경찰은 견제(牽制) 장치가 사실상 전무한 '1차 수사권의 독점적 주체'로 서게 된다. 지금도 권력 청탁, 증거 인멸, 사건 암장이 횡행(橫行)하는데, 최소한의 사법적 통제 장치마저 사라진다면 그 폭주를 누가 막을 것인가. 수사권 독점으로 인한 치안 구멍과 사법 피해는 오롯이 국민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불도저처럼 보완수사권 폐지를 밀어붙이던 정부와 여권도 이제야 사안의 엄중함을 인식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찰의 지휘·감독 체계 전반에 대한 점검과 근본적 쇄신책 마련을 지시했고, 한성숙 국무총리 역시 전국 실종 사건 전수조사 및 수사 체계 쇄신을 주문했다. 그러나 매번 사건이 터질 때마다 되풀이되는 형식적인 사과나 뒷북 수습만으로는 벼랑 끝에 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비대한 무한 권력은 어떻게든 부패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2026-08-26 05:00:00

  • [야고부-한윤조] 소외된 4050 무주택자

    [야고부-한윤조] 소외된 4050 무주택자

    정부가 발표한 '8·13 부동산 대책'을 둘러싸고 형평성 논란이 뜨겁다. 만 39세 이하 무주택 청년을 대상으로 LTV를 최대 80%까지 확대하는 '청년미래보금자리론' 등 파격적인 정책금융 3종 세트를 내놓았으나, 정작 주거 안정이 절실한 4050세대 무주택자들은 정책 지원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排除)됐기 때문이다. 만 40세 이상 무주택자는 청년 대상 정책금융과 월세 지원 등 주요 혜택에서 제외된다. 무주택이라는 공통 조건을 갖고 있어도 나이 기준을 넘으면 선택지가 급격히 좁아지는 구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집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나이로 사람을 가르냐" "이 나라에는 청년만 있냐"는 등의 반응이 줄을 잇고 있다. 나이 한 살 차이로 수억 원대의 금융 혜택이 엇갈리는 현상에 중장년층의 박탈감과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歸結)이다. 청년층의 자산 형성 부족과 생애주기 출발점에서의 주거 안정을 돕겠다는 정부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주거 불안은 특정 연령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령기(學齡期) 자녀를 양육하며 가장 많은 지출을 감당해야 하는 4050 무주택 가구 역시 벼랑 끝에 몰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동안 정부의 주거 정책이 청년·신혼부부·고령층에만 집중되면서, 오랜 기간 무주택으로 버텨온 중장년층은 늘 정책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왔다. 단순히 연령이라는 기계적 기준만으로 정책 혜택을 가르는 방식은 심각한 역차별을 낳는다. 금융당국은 기존 정책 모기지나 가점제를 통한 청약 기회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실질적인 금융 지원 없는 청약 확대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주거 불안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는 국민을 나이로 편가르기 하는 정책은 사회적 갈등만 부추길 뿐이다. 정부는 청년층 표심 잡기 식의 시혜성(施惠性) 지원이나 특정 연령대만을 겨냥한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거 문제는 단순한 연령 차원의 접근이 아닌, 가구원 수와 소득 수준, 무주택 기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포용적 시각에서 풀어야 한다. 전세와 매매 사이에서 고통받는 4050 장기 무주택자를 위한 맞춤형 금융 지원책을 신설해 정책의 사각지대를 메우고 공정한 주거 사다리를 구축하는 것만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2026-08-20 05:00:00

  • [야고부-한윤조] 외로운 한국인

    [야고부-한윤조] 외로운 한국인

    초고속 인터넷, 세계 최고의 스마트폰 보급률, 눈부신 지식·기술 수준, 도시마다 하늘 높이 솟은 끝없는 아파트 라인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초연결사회이자 도시화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형 뒤편에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어두운 고립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지난 10일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38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상 '더 나은 삶 지수(BLI)' 분석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주거 영역 1위, 지식·기술 영역 2위라는 압도적인 성과를 거둔 반면, 인간적 유대감의 척도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연결' 영역에서는 최하위권인 37위에 머무른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요청할 친지나 친구가 있는지를 묻는 '사회적 지지(支持)' 지표는 OECD 38개국 중 꼴찌인 38위였다. 이런 사회적 고립은 개인의 정서적 삶마저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36위(6.5점)에 그쳤으며, 부정적 정서 균형 지표 역시 29위에 머물렀다. 물질적 자산이나 주거 환경, 학업 성취도 등 외부적인 성과 지표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막상 삶을 체감하는 개인의 주관적 행복감과 정서적 안녕은 바닥을 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외롭게 만들었는가. 전문가들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개인의 정서적·문화적 발전 간의 박탈감(剝奪感)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압축성장의 과정에서 경쟁은 갈수록 심화됐고, 타인은 협력과 유대의 대상이 아닌 넘어서야 할 경쟁 상대로 인식됐다. 여기에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대면 상호작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오프라인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됐다. 몸은 물리적으로 밀집된 도시에 살고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철저히 고립된 '섬'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풍요는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연결과 삶의 여유가 부재한 풍요는 사막 위에 세워진 화려한 빌딩과 같다. 껍데기뿐인 성장에서 벗어나, 서로의 삶을 받쳐주는 견고한 사회적 지지망을 다시 구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hanyunjo@imaeil.com

    2026-08-13 05:00:00

  • 경상북도장애인종합복지관 봉화분관

    경상북도장애인종합복지관 봉화분관 "마음을 잇는 선, 피어나는 작품전" 개최

    경상북도장애인종합복지관 봉화분관은 지난 10일부터 오는 14일까지 봉화군청 솔향갤러리에서 "마음을 잇는 선, 피어나는 작품전"을 개최한다. 이번 작품전은 봉화군 교육가족과의 사회적 배려계층 지원사업으로, 젠탱글 및 재활프로그램에 참여한 장애인들이 수업 과정에서 직접 완성한 작품을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고, 작품 활동을 통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봉화군보건소,경북지체장애인협회봉화군지회,하눌보호작업장이 연계기관으로 참여해 지역사회 협력의 의미를 더했다. 이날 오프닝 행사에는 최기영 봉화군수, 이승훈 봉화군의회 의장을 비롯해 참여자, 가족, 지역주민 등 70여 명​이 참석해 작품전 개최를 축하하고 참여자들의 작품을 함께 감상했다. 특히 참여자들이 정성껏 완성한 작품 하나하나를 관람하며 작품에 담긴 이야기와 제작 과정에 관심을 보였으며, 참여자와 지역주민이 작품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뜻깊은 시간이 마련됐다. 김창숙 경상북도장애인종합복지관봉화분관장은 "이번 작품전이 참여자들에게는 자신의 노력과 성장을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고, 지역주민들에게는 작품을 통해 장애인의 다양한 가능성과 역량을 자연스럽게 만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26-08-11 14:17:08

  • [야고부-한윤조] 극심한 기후 양극화

    [야고부-한윤조] 극심한 기후 양극화

    지난달 한반도는 거대한 가마솥이자 양극화(兩極化)된 기후 실험장이었다. 경남 양산의 낮 기온이 42.5℃를 기록하며 우리나라 기상관측 사상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한반도 남동부 지역이 뜨거운 가마솥을 방불케 하는 동안, 중부지방에는 장맛비가 이어졌다. 낮의 폭염과 밤의 열대야, 지역별로 극명하게 갈린 강수량은 기후 위기가 더 이상 미래의 경고가 아닌 눈앞의 현실임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5일 기상청이 발표한 7월 기상 특성은 단순히 '무더웠던 한 달'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유례없는 이상기후 신호를 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역대급 밤더위다. 지난달 전국 평균 최저기온은 23.4도로, 전국 기상관측망이 확충된 1973년 이후 7월 기준 최고치를 경신했다. 밤 최저기온이 25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일 역시 전국 평균 9.7일을 기록하며, 종전 기록인 2024년 7월(8.8일)과 1994년 7월(8.5일)을 제쳤다. 또 다른 특이점은 극심한 더위가 특정 지역에 집중됐다는 것이다. 대구 22일, 경북 구미 21일, 경남 밀양 20일 등 영남권은 한 달의 절반 이상이 폭염에 시달렸다. 반면 서울의 폭염일수는 2일에 그쳐 한반도 남북 간의 기온 격차가 현저(顯著)했다. 비의 양상 또한 극단적이었다. 7월 전국 강수량은 220.2㎜로 평년(296.5㎜)의 72.3% 수준에 그쳤다. 북태평양고기압이 예년보다 빠르게 한반도를 덮으면서 정체전선이 남부지방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중부와 북한 상공만을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부 지역은 6월에 이은 비 부족으로 한 달 중 20.7일 동안 기상 가뭄을 겪어야 했다. 이번 7월의 기후 데이터는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폭염과 가뭄, 집중호우가 국지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기후 양극화' 현상이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간 폭염 대응 위주의 기존 방재 시스템에서 더 나아가 야간 열대야와 지역별 폭우, 가뭄·단수 대책까지 포괄하는 다층적(多層的) 대응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지구 온난화가 초래한 한반도의 열대화 현상 앞에 더 이상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지자체와 정부가 기후변화 적응 대책을 재점검하고, 에너지 및 수자원 관리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2026-08-06 05:00:00

  • [세풍-한윤조] 향찰(鄕察) 개혁 없이 경찰 신뢰 없다

    [세풍-한윤조] 향찰(鄕察) 개혁 없이 경찰 신뢰 없다

    이른바 '장윤기 사건'에 이어 최근 경남 지역에서 30년 넘게 근무한 경찰청 간부의 성비위 및 승진 청탁, 인사 개입 의혹까지 불거지자, 경찰 안팎에서는 이른바 '향찰(鄕察)'에 대한 구조적 해결의 필요성이 연일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응해 경찰청은 '경찰 수사 신뢰 제고를 위한 쇄신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며, 총경·경정급 중심의 타 시·도 순환근무를 경감급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국회가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동일 경찰서에서 10년 이상 장기 근무 중인 경찰관은 무려 1만7천 명을 넘어선다. 지역과 유착해 비리를 저지르는 일부 경찰을 뜻하는 '향찰'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비판적 수사가 아닌 치안 현장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국민의 우려가 상당하다. 경찰 조직의 중간 허리이자 현장 실무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경감과 경위 계급이면서 10년 이상 동일 경찰서에서 근무하며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이들이 경감 5천209명, 경위 8천697명에 달해 현장 지휘관 4, 5명 중 1명에 달한다. 지역 장기 근무는 지방으로 갈수록 심각하다. 서울경찰청의 경우 10년 이상 동일 경찰서 근무자 비율이 8.4%에 불과하지만, 일부 지방청은 소속 경찰관 5명 중 1명꼴로 장기 근무자일 정도다. 지방일수록 경찰서 수가 적고 생활권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기 근무 구조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역 사정과 인적 네트워크에 밝아 신속하고 밀착된 치안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부분은 장점인 반면, 그 '밀착'(密着)이 한 끗 차이로 '유착'(癒着)으로 변질될 경우 조직 전체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 수 있는 '양날의 검'인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경찰청이 내세운 순환인사제가 그 해법이 되기에는 한계가 크다. 1만4천 명이 넘는 경찰을 강제로 순환근무시킨다면 자녀 교육, 주거, 가족의 생활 기반이 한순간에 흔들리게 돼 조직 내부의 극심한 사기 저하와 반발이 일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또 강력·형사 등 장기적인 수사 연속성과 노하우가 필수적인 부서에서는 치안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순환'이 아니라 '현실적인 근무 환경과 제도 정비'를 통해 지방 근무를 피하려는 현상을 먼저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군 단위나 농어촌 등 근무 선호도가 낮은 지역에 대한 관사 확충, 주거비 및 교통비 지원, 인사상 인센티브 제공 등 고질적인 지방 근무 환경 개선이 선행된다면 자연스럽게 지방 근무를 자원하는 이들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또 무리한 전국 단위 이동보다는 인접 경찰서 간 권역 단위 순환인사를 활성화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생활권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부작용은 줄이면서도 특정 경찰서에서의 장기 독점을 막을 수 있는 타협점이 될 수 있다. 아울러 단순히 계급 기준의 순환인사만이 아니라 실제 비위(非違) 및 유착 가능성이 높은 직위와 업무 유형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돼야 할 필요가 있다.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엄정하고 공정한 법 집행에서 나온다. 장기 근무 시스템을 이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비판 여론을 의식한 보여 주기 식 정책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합리적인 인사 개혁안에 대한 숙고(熟考)가 중요하다. 비위와 유착을 사전에 감지하고 엄단할 수 있는 투명한 감찰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인사이동은 그저 비위의 장소만 옮기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

    2026-07-29 05:00:00

  • [야고부-한윤조] 원화 국제화

    [야고부-한윤조] 원화 국제화

    외국인이 자국 현지 은행에 개설한 원화 계좌를 통해 다른 외국인과 원화를 주고받는 길이 열린다. 정부가 발표한 '원화 국제화 로드맵'에 따라 역외원화결제기관 제도가 신설되고, 오는 9월 시범 운영을 앞둔 한국은행의 '원화국제결제망'이 내년 1월부터 24시간 가동될 예정이다. 외환시장 24시간 개장에 이어 글로벌 기준 매매기준율(TWAP) 도입, 현지통화직거래(LCT) 활성화, 원화 표시 스테이블코인 거래 근거 마련까지 원화 거래의 진입장벽을 대폭 낮추는 전향적 조치들이 잇따르고 있다. 1992년 자본시장 개방 이후 약 30년간 위기 예방과 통제에 집중되었던 외환 정책의 패러다임이 원화의 활용성을 고평가하고 영토를 넓히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중대한 계기다. 세계 외환 거래에서 원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1.8% 수준으로 세계 12위에 그친다. 무역과 경제 체급에 비해 원화의 국제적 통용성이 크게 떨어졌던 배경에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형성된 달러 유동성 경색의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시장 중심의 까다로운 신고·규제 체계가 유지되었고, 글로벌 투자자들은 계좌 개설 마찰과 야간 환전의 불통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다. 결과적으로 원화 환위험 헤지 수요가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으로 몰리면서, 투기성 거래가 국내 현물환율을 흔드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되기도 했다. 이번 로드맵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이러한 접근성 한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했다는 점이다. 과거 호주가 외환 규제를 철폐하고 역외 시장을 키워 소규모 개방경제의 한계를 극복했던 사례와 궤를 같이한다. 특히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 걸림돌을 해소해 만성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는 모멘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시장 개방의 길목에는 감내해야 할 리스크가 공존한다. 원화의 역외 유동성이 커질수록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거나 위기 상황 시 환투기 세력의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될 위험을 배제하기 어렵다. 외환당국이 전면 개방 단계적 자유화를 채택한 이유다. 정밀한 모니터링 체계를 바탕으로 단계적 규제 완화를 차질 없이 진행하는 과정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2026-07-23 05:00:00

  • [야고부-한윤조] 애국 기업 돈쭐

    [야고부-한윤조] 애국 기업 돈쭐

    7월부터 코스피 상장유지 시가총액 기준이 300억원으로 상향되는 등 상장유지 제도가 대폭 강화되면서 무더기 상장폐지 위기에 처한 저가주들이 속출한 가운데, 뜻밖의 구원투수를 만나며 기사회생한 기업들이 있다. 바로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지켜 온 토종 기업인 한성기업과 모나미다. 이들 기업은 지난달 말 기준 시가총액이 각각 261억원, 227억원에 불과해 상장폐지 우려에 직면했지만 좋은 기업은 '돈쭐'(돈을 써서 혼쭐내준다는 반어법)을 내줘야 한다는 소비자들의 집단적 연대로 극적인 반전(反轉)을 맞이했다. '크래미'로 잘 알려진 한성기업은 25년 넘게 유엔 참전 용사를 위한 평화음악회를 묵묵히 후원해 왔다는 미담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재조명되면서 "기업이 상폐되게 둬서는 안 된다"는 소비자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주식 및 제품 구매 인증 글이 쏟아지며 한성기업의 주가는 이틀 연속 상한가를 기록하는 등 급등 가도를 달렸고, 단숨에 시가총액 500억원을 넘어섰다. 불길은 모나미로도 옮겨붙었다. 모나미는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촉발된 '노 재팬(NO JAPAN)' 운동 당시, 주가가 한 달 만에 250% 이상 치솟으며 대표적인 애국 테마주로 각인된 바 있다. 이번 상장폐지 위기 속 SNS에는 "애국 기업 모나미 살리자" "메이드 인 코리아 절대 지켜"와 같은 슬로건과 함께 자발적인 10주 사기 운동 등이 확산됐고, 시가총액 300억원 돌파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시장에서는 이 현상을 두고 단순한 애국 소비의 프레임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주주 행동주의'라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지만, 이 훈훈한 감동 서사 이면에는 자본시장의 냉혹한 현실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시적인 유동성과 정서적 연대에 의존한 테마성 상승은 결국 한계를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대중이 보여준 '애국 매수'는 위기에 처한 토종 기업에 단순한 자금 수혈(輸血)이 아닌 체질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을 벌어준 것이다. 이제 경영진은 뼈를 깎는 경영 혁신과 신성장 동력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생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힘이 되어 준 소비자들에게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2026-07-16 05:00:00

  • [야고부-한윤조] 인공지능(AI) 안경

    [야고부-한윤조] 인공지능(AI) 안경

    기술의 진보는 언제나 인간의 삶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스마트폰이 손안의 세상을 열었다면, 손을 쓰지 않고도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거나 음성 명령을 통해 인공지능(AI)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AI 안경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디지털 영토로 편입하겠다는 야심 찬 선언이다. 실제로 '메타 안경(Meta Glasses)'을 비롯한 AI 안경은 세계적으로 수백만 대가 팔려 나가며 일상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 혁신의 이면에는 벌써 '변태 안경'이라는 모욕적인 오명이 따른다. 타인의 일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할 수도 있는 윤리적 허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공포는 감시를 인지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뷰파인더'에 있다. 기존의 불법 촬영 기기는 소지나 은닉 자체로 사회적 지탄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반면, AI 안경은 '스타일리시한 웨어러블 기기'라는 세련된 가면을 쓰고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우리 일상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최근에도 AI 안경으로 데이트 상대 여성을 몰래 촬영한 뒤 해당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남성이 경찰 수사를 받기도 하고, 토익 시험을 치던 2명이 시험관에게 적발되는 등의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했다. 내 옆에 앉은 이가 나를 바라보는 평범한 시선 자체가 언제든 나의 음성과 모습을 무단 수집하는 은밀한 도청기이자 카메라가 되는 위험성을 배제하기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은 이동형 영상정보처리기기로 촬영할 때 불빛이나 소리로 촬영 사실을 명확히 알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그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촬영 중임을 알리는 소형 표시등(LED)을 가리는 방법이 온라인에 넘쳐나고, 앞면 표시등에 불이 켜졌는지 볼 수 없게 하는 차단 커버까지 유명 쇼핑몰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시장에 대비해 입법자들과 규제 당국은 이제라도 새 기술의 위험성을 직시(直視)하고 법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AI 안경 등과 같은 웨어러블 기기가 확산할수록 촬영 고지와 사전 동의, 불법 촬영물 유포 방지, 표시등 변조 차단 등 '기술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방치된 윤리적 공백을 메우는 실효성 있는 제도적 안전망(安全網)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2026-07-14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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