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세상에는 참사가 없겠지요. 이제 평안히 쉬소서".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7명의 첫 장례식이 20일 오전 파티마, 곽병원 등 대구지역 6개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인들의 마지막 가는길은 그야말로 '눈물길'이었다.
이날 장례식이 치러진 희생자는 김창제(68.대구 입석동.가야기독병원), 원경미(30.여.방촌동.곽병원), 노영준(34.본리동.조광병원), 이경숙(19.여.대명동.조광병원)씨 등 시민 4명과 지하철 공사직원 장대성(34.파티마병원).정연준(37.대명동.가톨릭병원).최환준(34.지산동.효심병원)씨 등 모두 7명.
이번 참사 때 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장대성씨의 영결식 있은 20일 새벽 파티마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족.친지.동료들은 고인을 보내지 못하겠다며 관을 붙잡고 오열했다. "대성아, 이게 무슨일이냐...가면 안된다". 관이 버스로 옮겨지자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불렀고 임신중인 아내는 실신했다.
가톨릭병원 차려진 정연준씨(대구지하철공사 통신역무사업소 직원)의 빈소에서는 유족과 친지, 동료 등 60여명이 고인의 마지막길을 지켜봤다. 정씨는 6세, 3세된 아들을 뒀는데 장남 동현 군은 의연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마지막길을 지켜봐 주변사람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정씨의 유해는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동리 장지로 향했다.
대구 효목2동 효심병원에선 역시 대구지하철공사 직원인 최환준(34)씨 영결식이 열렸다. 유가족은 "미혼인 최씨는 평상시 조용한 성격에 직장생활도 성실하게 근무해 왔다며 "이렇게 착한 사람이 왜 비참하게 죽어야 하나"며 흐느꼈다.
원경미(30)씨의 장례가 치러진 곽병원 장례식장에서 남편 이재동(32)씨는 "여보, 나는 당신을 못보내오"라며 절규했다. 발인이 시작되자 가족들은 참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뜨려 주변은 한 순간에 눈물 바다가 됐다. 오전 7시45분 고인의 유해는 대구 시립화장터로 향했다.
김창제(68.대구 입석동)씨의 영결식이 있은 가야기독병원 장례식장도 슬픔을 가누지 못한 유족들의 오열이 이어졌다. 사고가 나던 시각 김씨는 휴대폰 전화로 아내에게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을 남겼다. 김씨의 유해를 실은 장례차는 대구 현풍 장지로 향했다.
◈ 본보 보도 사진보고 아들 신원 확인
"입을 가리고 있는 저 아이가 바로 큰 아들입니다. 얼마나 찾았는데…"
대구 시민회관 유족 대기실에 있던 허우석(49.대구 지산동)씨가 아들의 소식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며 19일 저녁 매일신문사로 달려 왔다. 본지가 이날 1면에 특종 보도한 독자 사진이 TV 화면을 통해 인용보도됐던 것. 전국은 물론 외국 언론에까지 보도된 이 '참사 직전 객실 내부' 사진에는 실종자 명단에 올랐던 허씨의 아들 허현(29.경산)씨의 모습이 뚜렷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을 몰라보겠습니까? 입고 있는 저 옷도 제가 입으려 했던 바로 그 옷입니다".
IVF(한국기독학생회)학원 선교단체 간사로 일하던 아들 허씨는 이날 담당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사고가 난 중앙로역 다음역인 반월당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산 자취방에서 트럭을 타고 반야월역까지 간 뒤 반월당행 지하철을 탔다는 것. 그리고 허씨는 사고 당시 동료 간사인 강모씨와의 휴대폰 통화를 통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함께 기도해 달라"는 말을 남긴 후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사고 후 숨진 허씨의 가족과 동료들은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대구시내 병원을 헤매고 다니다가 18일 낮부터 대구시민회관 유족 대기실에 모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보도된 사진과 이전의 모습을 비교해 가며 매일신문사 편집국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습 이후의 소식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지하철 방화사건으로 숨져 사체가 수습된 사망자 53명 중 44명의 신원이 19일까지 밝혀졌다. 덕분에 20일부터 일부 가족을 시작으로 장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초기엔 절반도 채 안됐던 신원 확인자가 이같이 증가한데는 사체 훼손 정도가 심한데도 희생자에게 쉴 곳을 한시라도 빨리 마련해 줘야 한다는 가족들의 눈물 어린 발품 팔기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를 잃은 이모(40)씨는 사고 발생 직후부터 비슷한 연령의 환자나 희생자를 확인하려고 병원마다 전화를 걸었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고 했다. "대구시내 병원 20여개를 몽땅 뒤진 뒤 달성군까지 가서야 시신을 찾았습니다. 하루가 10년처럼 길었습니다". 김씨는 정말 긴 여행이었다고 했다.
칠순의 아버지를 떠나 보낸 또다른 이모(43.여)씨는 병원 20개를 돈 것은 물론, 아버지가 가던 동네 치과의사까지 동원해 치과기록을 내밀고서야 19일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사고 당일 하루를 꼬박 찾고 그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한 병원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행정 당국은 도와준다고 얘기만 했지 결국 모든 수고는 우리 몫이었습니다. 시신을 찾고 나서도 검찰의 허가가 떨어져야 인도가 가능하답디다. 무슨 절차만 그렇게 까다로운지… 정말 이토록 애태운 이틀은 제 평생 처음일겁니다". 이씨는 힘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육순의 모친을 잃은 박모(38)씨는 "당일 입고 나간 어머니 외투가 특이한 덕분에 시신을 찾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사고대책본부 한 관계자는 "화재 사고여서 시신 확인작업이 늦어졌으나 모든 병원을 뒤지는 유족들의 헌신적 노력 때문에 사망자 신원 확인이 비교적 빨리 진행되고 있다"며, "유전자 감식 등 온갖 얘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유족들의 발빠른 자체 확인작업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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