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두 시다
일어나거라". 어릴 적 어머니가 깨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친척들이 모여있고, 상위에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다.
제삿날이다.
오빠들 뒤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서 있다 보면 제사는 끝난다.
음복을 해야 하지만 잠이 더 급해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잠에 빠져든다.
아침이 되면 제사 음식은 이미 이웃들 몫으로 접시에 담겨 있고, 그것을 한 집 한 집 나누어 주는 일은 내 차지다.
먹을 것이 많지 않던 시절 이웃들은 여러 나물이 섞인 제삿밥과 몇 점 되지 않는 고기며 반 쪽 자른 과일을 반가이 받아들며 말한다.
"잘 먹겠다고 전하거래이. 빈 그릇을 주어서 우짜노".
집에 돌아오면 음식 부스러기들만 남아 있다.
이웃에게 다 줘 우리 먹을 것은 없다고 짜증을 내면 어머니는 "음식은 나누어 먹어야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지만 그런 어머니가 불만이었다.
세월이 흘러 유학 시절 집 앞 조그만 밭뙈기를 분양받아 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다.
생활비를 아낀다고 상추·근대·쑥갓 등 채소를 직접 길러서 먹었다.
그 중 호박이 자라는 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씨를 심어놓으면 호박은 어느새 줄기를 뻗고 잎이 무성해진다.
자고 나면 그 무성한 잎 사이로 애호박이 보석처럼 몇 개씩 숨어 있곤 했다.
여름이 끝나 누렇게 된 늙은 호박이 밭고랑 여기 저기서 뒹굴 때쯤이다.
하루는 동료 유학생이 우리 집에 늙은 호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아내가 출산 뒤 몸이 부었는데 늙은 호박을 먹어야 부기가 빠진다고 사정을 말하기에 밭 위치를 가르쳐 주고 필요한 만큼 따 가라고 했다.
다음 날 밭에 가 보았더니 대여섯 되는 늙은 호박이 하나도 없이 몽땅 다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내년에 종자로 쓸 호박 한 덩어리는 남겨두어야 하는데. 아내 생각에 다급한 나머지 늙은 호박을 모두 가져간 그 사람이 몹시 야속했다.
순간 머리속에서는 음식은 나누어 먹는 법이라는 어릴 적 어머니 말씀이 스쳤다.
제사 다음날 음식을 나누었던 기억과 늙은 호박에 대한 추억은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나눠먹는 즐거움을 일깨워 준다.
상주대교수·영문학
댓글 많은 뉴스
'박정희 기념사업' 조례 폐지안 본회의 부결… 의회 앞에서 찬반 집회도
법원장회의 "법치주의 실현 위해 사법독립 반드시 보장돼야"
李대통령 "한국서 가장 힘센 사람 됐다" 이 말에 환호나온 이유
李대통령 지지율 50%대로 하락…美 구금 여파?
김진태 발언 통제한 李대통령…국힘 "내편 얘기만 듣는 오만·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