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의 주말 들녘. 뙤약볕으로 축 늘어졌는지 개 짖는 소리도 없던 이 마을을 지키는 것은 양파 캐는 노인들의 호미 소리였다.
"오랜만에 일을 해보니 내 참 좋소. 생전에 양파밭 본 것도 여기가 처음이오" "사할린에선 따뜻한 날이 드물어 농사를 잘 못지어요. 양파 뽑아낸 자리에 모를 심는다니 신기하요".
◇수구초심(首邱初心)의 반세기
호미질하는 노인들은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해 이곳 '대창양로원'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모처럼 동네 양파밭에 품앗이를 나왔던 참. 늘 이웃들의 도움만 받아오다 일손이 달리는 모내기철이라 소매를 걷어붙였다는 것. 툭툭 흙을 털고 일어서는 품에 보람이 가득해 보였다.
"제정(일제시대) 때 흉년 들고 살기 어려워 부모 따라 사할린엘 갔지. 공출때문에 영 살 수가 없었다는 거야. 거기서 대동아전쟁도 치르고 해방도 맞고, 내 청춘 다 보냈소". 포항이 고향이라는 이 양로원의 회장님 윤상원(75) 할아버지의 세월을 향한 항변이었다.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 홋카이도를 거쳐 꼬박 일주일 달려 도착한 낯선 동토. 그곳에서 광부.벌목꾼.인쇄공….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고국 방문단에게 문이 열렸던 1990년, 할아버지는 50여년만에 본 조국에 기어코 뼈를 묻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고향집 터에는 고층건물이 들어섰고 친척이고 친구고 다 죽고 없었소. 그래도 남의 나라 땅에는 묻히기 싫었지. 타향살이 안해 본 사람은 모를 거요. 자식들 손길도 뿌리치고 이리로 떴소". 사할린으로부터 걸음을 되돌리는데 55년. 1997년 영구 귀국했다.
현지에 남겨 둔 2남2녀와 가끔 편지.전화도 교환하고, 내년엔 한차례 다녀 올 계획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젊은 자식들 중 하나라도 영구 귀국이 허락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25명 세상 뜨고 5명 역귀환
대창양로원은 1993년 5월 문을 열어 이듬해 입주가 시작된 사할린 영구 귀국자들의 보금자리. 올해로 입주 10년째. 꽃다운 나이에 조국을 떠났다가 백발이 돼 돌아온 노인들이 벌써 고향 나라에서 또한번 '강산이 변할' 세월을 보낸 것이다.
1994년 처음 영주 귀국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 국내로 들어온 사할린 영구 귀국자는 1천200여명. 인천의 '사할린 한인 복지회관'(95명), 경기도 안산의 '고향마을'(489가정, 각 가정 2명), 서울.인천 영구임대아파트(82가정)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59명이 사는 대창양로원은 '귀국촌' 중 가장 작은 셈이다.
대창양로원엔 1994년 45명이 처음 들어온 이래 1997년 25명, 1999년 15명, 2001년 15명, 올 1월 5명 등 모두 105명이 입소했다.
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보다 큰 다른 귀국촌으로 옮겨갔고 25명은 벌써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다.
사할린으로 돌아간 이도 5명이나 된다.
◇그래도 못잊는 사할린 가족
뼈를 묻을 결심으로 찾은 땅이었지만, 노인들은 귀국 초 매사가 너무도 낯설었으며 "추운 나라에 살다보니 고국 여름이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사할린 음식이 싱거운 반면 한국 것은 맵고 짜 애를 먹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옛 가락이나 풍물도 기억에 가물가물하고….
노인들은 멍하게 지내느니 소일거리도 삼을 겸 해서 부업도 한다고 했다.
비닐하우스용 플라스틱 부속을 600개 한 상자분 조립해 2천원을 버는 사람도 있고, 1장에 10원 주는 쇼핑봉투 붙이기도 한다는 것. 이렇게 번 돈을 한달에 4만5천~5만원 나오는 경로연금과 보태 사할린 갈 때 선물을 산다고 했다.
8년째 노인들과 함께하는 봉사회 이영숙(56) 총무는 "비누.치약.내의까지 아껴 사할린 자식들 갖다 준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사할린에 남겨진 자식들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래도 고향이 편하다"는 노인들에게 의지가 돼 주고 있는 사람들은 역시 자원봉사자들. 특히 고령군여성연합회의 11개 단체가 순서를 정해 정기적으로 찾고 있다고 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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