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난 자리에 무엇이 남았을까. 중간고사가 끝난 고1 교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학생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오히려 대학입시를 좌우할 열두 고개 가운데 하나를 어떻게든 넘었다는 여유로움이 비쳤다. 마치 아무리 태풍이 휩쓸고 가도 끝내 삶을 회복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니냐는 듯이.
"시험 힘들지 않았냐?"라는 물음에 모두들 우물쭈물하더니 누군가 "어쨌든 끝났잖아요"라고 외치자 너도나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잔뜩 긴장했는데 막상 쳐 보니 별 거 아니데요", "공부한 만큼 나오는 점수를 어찌할 도리가 있나요", "다음에 잘 치면 되죠. 많이 남았는데" 하며 중구난방이었다. 지레 호들갑을 떤 이들이 무안할 정도였다.
돌아서 나오는데 한 녀석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유독 따갑게 들려왔다. "돌아가는 걸 보니 앞으로 입시가 어떻게 바뀔지 누구도 모르겠던데, 교육부고 언론이고 안 믿는 게 상수지."
씁쓸함을 씹으며 교사들을 만났는데 영 딴판이었다. 학생들보다 더 긴장했다는 듯 중간고사 한 번 치른 피로가 심각해 보였다.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출제하고 감독하고 채점하는 일이 예전의 몇 배예요. 이래저래 잡무도 많은데 앞으로 한 학기에 두 번씩 홍역을 치르게 생겼어요.", "동점자 많이 안 내려고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닌데 교육청에선 평균 점수를 75~78점 사이에 맞추라고 해요. 말이 쉽지 평균을 어느 정도 맞추려면 애들 실력을 훤히 알아야 하는데, 1학년 여섯 반 2학년 세 반 수업하는 형편에는 감당이 안 되죠."
학교 근처 학원에 들렀더니 분위기가 또 달랐다. 한 강사는 "학교 시험 중요하다고 하니 강의 듣는 애들은 좀 늘었지만…"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궁금한 얼굴을 하자 "중간고사 범위래야 뻔하거든요"라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학교서 쓰는 부교재에다 잘 나가는 문제집 몇 권 정리하고 몇 년 간 기출문제 종합하면 예상문제 어지간히 나오죠. 학교 선생님들 웬만큼 공들이지 않으면 여기서 못 벗어납니다. 족집게 소리 들어야 하니 그걸 갖고 강의는 하지만, 거기 목숨 거는 애들 보기 딱합니다. 고등학교 가려면 내신 잘 받아야 한다고 학원 오는 중학생들 꼴이나 똑같아졌어요."
교육부가 고교 교육을 정상화하겠다고 내신 중심 새 대입제도를 내놓은 결과가 이게 다는 아니겠지만,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흔히 떠들 듯 고교생들의 시험 공포라든가, 한 달도 안 돼 거짓말로 드러난 하향전학 도미노라든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학생과 교사들에게 각인된 교육정책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문제다. 그런데도 여전히 변명과 미봉책만 일삼는 교육부가 더 걱정스럽다.
순리대로 계곡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강 하류에 비옥한 삼각주를 만든다. 그러나 태풍은 비옥한 농토를 한순간에 뻘밭으로 만든다. 태풍에 치이고 이를 되살리는 것이 아무리 인간의 숙명이라고 해도, 논밭에 들어찬 뻘 치우는 일에만 매달려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하물며 가장 어렵다는 사람 농사에서야 오죽하겠는가.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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