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밖)울진군 북면 절골 사람들

오늘을 사는 2030세대들에게 이념 논쟁은 '구시대적 유물'쯤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직접 겪은 전전세대(戰前世代)들에겐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아픔' 그 자체이다. 무장공비 침투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버리게 된 이들에게도 마찬가지.

이 때문일까.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실향민이 된 울진군 북면 주인3리 절골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낯선 외부인들과 만남 자체를 극도로 경계하는 눈치였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허리가 활처럼 휜 촌로가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에 대뜸 "여기가 무장공비 사건 때 집단이주해 온 절골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촌로는 낯선 이방인의 품새를 아래위로 몇 차례 훑어보곤 아무 말 없이 길을 재촉했다.

하는 수 없이 첫 농가에 들어가 주인을 찾았더니 분위기는 처음 만난 촌로보다 더 냉랭했다. 다음 집도 마찬가지. 연방 말을 걸어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는 수 없이 후일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다음날 울진원전 홍보부를 찾았다. 반갑게 맞는 박완국(40) 과장을 사정 설명 없이 반강제로 차에 태웠다. 언젠가 절골이 고향이라며 자랑하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박 과장과 함께한 자리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문전박대를 당한 첫 농가에 들러 "아제요. 완국이 왔니더. 잘 계셨는교"로 시작된 인사는 어제의 경계심을 눈 녹이듯 풀어나갔다. 소죽을 끓이던 최만식(71) 씨는 황급히 쫓아 나와 박 과장의 두 손을 잡으며 반갑게 맞았다. 얼마 전 다녀간 아들 내외가 사왔다며 음료수도 내주고 처마 끝에 매달아 말리고 있는 곶감도 빼주었다. 어제는 왜 그렇게 싸늘한 반응을 보였느냐는 질문에 최씨는 "도회지 나가 사는 자식들 외에 찾을 사람 없는 이 산촌에 낯선 젊은이가, 그것도 마을에서 금기시하다시피 하는 무장공비 얘기를 덜컥 꺼내니 누군들 경계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야기 보따리는 술술 풀렸다. 더욱이 최씨가 당시 공비 출현을 릴레이식으로 신고한 주민 중 한 사람이었고 또 최씨의 아버지 최창대(지난 8월 작고) 씨 역시 공비들에게 끌려갔다 생환한 6명(모두 작고) 중 한 사람이어서 증언은 사실감이 넘쳤다.

이야기는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11월 2일 새벽. 울진과 삼척의 경계인 북면 고포 마을 앞바다로 침투한 무장공비 120여 명 중 30여 명이 등산복과 신사복으로 변장하곤 20km쯤 떨어진 산 속 고수골로 잠입했다. "면에서 주민증 발급용 사진을 찍으러 나왔다"며 사람들을 모은 이들은 어느새 북한 군복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사상교육을 시키며 노동당 입당을 강요했다.

점심 무렵이 되자 이들은 남자주민 7명만 데리고 매봉산 쪽으로 향했고 흰목이 고개에 다다르자 사상교육에 불충실했다는 이유로 전모(당시 31세) 씨를 즉석 인민재판에 회부, 살해했다. 때마침 우편배달을 위해 고개를 넘어오던 강모(당시 37세) 씨도 사살됐다. 공비들은 사상교육을 한 차례 더 시키고 나서야 주민들을 풀어주었다.

그 사이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의 신고 릴레이가 이어졌다. 결혼하면서 고수골을 떠나 탑골에 살던 최만식 씨에게 김준하(80년대 초 작고) 씨가 찾아와 공비 출현을 처음 알렸고 최씨는 경찰지서가 있는 부구리를 향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최씨는 절골을 찾아오던 어떤 이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 사람은 또 이름모를 주민에게, 그 주민은 또 다른 주민에게 공비출현을 알렸다. 최씨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지서에 도착했을 땐 이미 경찰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김태규(67) 씨는 "마을로 들어온 국군도 다짜고짜 '빨리 아랫마을로 내려가라'면서 콩가리와 수수덤불을 모조리 불질러 버려 무서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주민들의 투철한 신고 덕분에 공비 113명은 사살되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은 막을 내렸지만 고수골과 탑골 주민들의 실향 생활은 이 때문에 시작됐다. 출동한 군경이 곳곳에 흩어져 살던 10여 가구 20~30명을 5km 떨어진 아랫마을인 절골로 내려보낸 것. 하지만 뾰족한 생계수단이 없자 한두 사람씩 도회지로 빠져나갔고 정부에서는 몇 사람 남지 않았을 때 판잣집 4채를 지어줘 14평짜리 1동에 2가구가 살았다. 요즘말로 '한 지붕 두 가족'인 셈이었다.

최씨는 "그래도 그때는 행복했다"며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이 생긴 데다 원주민과 이주민 등 모두 20여 가구가 살던 동네에서 이주민집이 현대식(?)으로 가장 좋았다"고 했다.

현재 절골에는 13가구가 살고 있다. 이주민은 최씨를 포함해 5가구가 남아있다. 이 중에서도 할머니만 생존해 있는 집이 3가구나 된다.

고향에 대한 향수일까. 아니면 선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때문일까. 막힘이 없던 최씨도 말끝을 흐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렸다. 주민들이 냉담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안한 생각에 최근 이슈가 됐던 동국대 강정구 교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관심 없다"고 잘라 말했다. "TV에서 그 얘기가 나오면 곧장 채널을 돌려버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미친 짓이야. 그들이 우리네와 같은 가슴앓이를 해본 적이 있냐고."

아! 이들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 밖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가슴 속에 아직도 전쟁이, 공비 소탕전이 전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고수골이나 탑골에 가도 이들의 '고향'은 없다. 발길이 끊어진 오솔길은 지워졌고 촌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춧돌 몇 개와 감나무 몇 그루가 집터였음을 겨우 짐작게 할 뿐이다.

산골의 저녁은 일찍 찾아왔다. 어느새 앞산 그림자가 반대편 산 중턱에 덩그러니 걸렸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말을 뒤로 한 채 마을을 서둘러 나섰다.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죄송하다는 생각만 안고 돌아왔다.

울진·황이주기자 ijhwang@msnet.co.kr

사진 :처마 끝에 걸린 곶감을 손질하고 있는 김태규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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