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춘향이 살던 집에서, 구보씨 걷던 길까지

민족문학사연구소 엮음/ 창비 펴냄

과거와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는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든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오고가는 그 길이 바로 내가 걸어다녔을지도 모르고, 가 볼 수 있는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학의 배경이 되는 곳, 그리고 그 작가가 태어난 곳을 찾아 떠난 글 15편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 '춘향이 살던 집에서, 구보씨 걷던 길까지 - 한국문학산책'이다.

각종 문화유산 답사기에 테마여행 책과 달리 우리 문학유산을 각 주제별 전문가들이 직접 발로 뛰며 써내려간 현장의 보고서다. 찾아간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만이 아니라, 관련된 문학작품에 대한 (전문가적인) 완벽한 이해를 토대로 새롭게 의미를 찾아내고 현장감을 전달하고 있다. 고전문학, 현대문학의 현장을 찾고, 동아시아에서 찾은 한국문학의 흔적을 뒤쫓고 있다.

책은 신라에 관한 한 어느 것 하나 일연 손수 발로 찾아 걸어가서 몸으로 실험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삼국유사 이야기로 시작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걸었던 길을 되걸으며 저자 고운기가 내린 결론은 삼국유사가 '삼각의 구상화(具象畵)'라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들이 일연이 취학하기 위해 걸었던 고향 경산에서 광주까지의 길, 승려가 되기 위해 걸었던 광주에서 양양까지의 길(경산-광주-양양)의 삼각형 안팎의 현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부터 조선조까지 '민족문학과 민족지성의 산실'이었던 강화도, 춘향이 그네를 뛰고 이도령과 봄기운을 즐기던 남원, 퇴계가 벼슬을 물리고 돌아가 세운 도산서원, 망국의 한에 비분강개하며 자결로써 지조와 절개를 지킨 매천 황현의 유적지를 찾은 저자들은 각각의 장소와 관련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나간다.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으며 이 현장들은 단순히 문학의 현장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대문학에서는 근대 이후 우리 문학의 주배경이 됐던 경성(서울), 부산, 인천, 제주 등지의 풍경을 찾아간다. 소설가 구보 씨가 하루 동안 걸었다는 경성의 길을 따라 걸으며 청계천 공사로 달라진 모습을 그려낸다. '탁류'의 고향 군산을 찾아 그 아픈 현대사도 짚어본다. 월북작가의 생가를 찾은 강진호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흥망을 거듭한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경험을 기록하며 문화적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인 부산 '근대문학의 기항지' 인천 '학살의 기억'이 남은 제주도의 현장도 돌아본다.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곳은 우리 문학의 자취가 남아있는 도쿄와 베이징 이야기다. 피란의 현장이자 항일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중국으로 넘어간 뒤 베이징을 찾았던 단재 신채호의 뒤를 좇은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국권회복을 꾀했던 그의 당시 생활을 조명한다. 일본 도쿄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에겐 수모와 치욕으로 가득찬 역사라 할 수 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재일 한국인들이 학살당해야 했던 역사가 우리 문학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도 추적한다.

이 책의 글들은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반년간지 '민족문학사연구'에 발표된 글이기에 세월의 변화를 피할 수가 없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옛 시조와 달리 우리 사회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걸만 아니라 산천 또한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기 때문이다. 처음 답사 때에는 볼 수 없었던 기념관과 문학관이 건립돼 긍정적인 변화를 겪은 곳도 있다. 그러나 그나마 남아 있던 유적조차 무자비한 개발의 손길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있다.

이런 한계가 있음에도 독자들에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의 교훈을 일깨워 직접 발로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도록 마음을 동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할 것 같다. 글과 함께 곳곳에 곁들여진 150여 장의 사진을 보며 간접체험하는 재미도 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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