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私學, 100년 전에도…

대구'경북 지역에 사학(私學) 설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00년 전인 1906년 1월 '대구 광문사(廣文社)'가 세워지면서부터였다.

당시 광문사의 설립자들은 대구 지역의 거상(巨商) 기업인, 지주층, 전직 관료, 유교 지식층 등 요즘식으로 분류하자면 보수 기득권층이었다. 그들은 반드시 엽전 100냥씩을 출연해야만 광문사에 가입할 수가 있었다.

일종의 기부와 희생을 조건으로 한 사회 참여와 봉사였다. 광문사 멤버들(초기 400~500여 명)이 설립 직후 가장 먼저 벌인 활동은 교육 진흥 중심의 시민계몽운동이었다.

부사장 서상돈은 '한국이 빈약하고 관리의 압제 및 외세의 침입을 받은 이유는 민지(民智)가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교육 방침을 면밀히 연구하며 농상공업을 발달시키자'고 역설했다.

1906년 4월 '학교 설립에 매진하라'는 황제의 칙유와 하사금 1천 원을 바탕으로 대구사립양성학교 등을 잇따라 세우면서 경북 관내 41개 군(郡)에 370여 개의 학교가 설립되게 되고 4천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대구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인 대구양성여학교도 이 무렵에 세워졌다.대구의 사학 설립을 통한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한 보수 진영 주역들은 1920년대 들면서 대구 청년 지도자층으로도 확산됐다.

특히 대구청년회는 조선불교청년회, 기독청년회, 해성명도회(明道會), 여자기독청년회 등 단체와 '단연(斷煙) 금주(禁酒) 토산(土産) 장려 선전 연설 연합대회'라는 계몽 활동을 벌이면서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뿐 아니라 피폐된 나라 경제의 부흥을 통한 외세 대항을 주창했다.

이처럼 100년 전 대구의 중소 자본가'교육 운동가'젊은 지식층 법조인 등 보수 계층은 사학 설립과 지원을 통한 민지(民智)의 계몽과 물산(物産)장려운동을 통한 경제 자립을 시급한 지역 어젠다로 보았고 기부금 기탁 등 행동과 희생으로 어젠다의 실천에 노력했던 셈이다.

그러나 100년 전에도 그러한 보수 계층의 사학 장려와 물산장려라는 긍정적 구국 노선에 딴죽 걸고 훼방 놓는 세력은 존재했다. 다수 학자들은 그 존재를 '조선노동공제회'라는 단체로 지목한다.

조선노동공제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조직 내부에 '마르크스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남조선 노동총동맹 대회 같은 거나 열면서 물산장려나 공장 설립 투자 대신 인력거노우회(勞友會), 직공조합 등 노조 단체들을 주로 만들었다.

그들은 또 대구청년회 서상일이 '청년은 민족주의를 가져야지 사회주의를 가지면 조선의 청년이 아니다'고 한 발언에 '나팔주의자 즉 허언주의자 같다'며 요즘의 인터넷 댓글 떼거리 같은 공격을 가했다.

특히 민족 자멸을 막기 위해서는 생산 증식이 절실한 물산장려가 필요하고 '주체는 여력이 있는 중산층이 중심이 돼 일해야 한다'는 보수 쪽의 논리에 대해서도 '원래 우리 노동자는 그날그날에 분망한 터라 어느 세월에 토산'비토산을 선택할 여유도 없거니와 물산을 장려하려 한들 할 수도 없는데 찬성하면 무엇 하느냐'며 반대와 비판만 했다. 이후 '소작쟁의' 등 소수의 물리적 시위를 벌이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조직력이 점차 불어나면서 자본가'지식 계층이 주도한 교육 계몽'물산운동은 서서히 밀리고 약화됐다.

사회주의 계층의 사회 운동은 인적인 숫자나 자본력에 관계없이 타당하고 공익적인 가치를 흔들고 약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100년 전의 교훈으로 볼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종교계와 자본가, 교육운동가 등이 선구자적 이념과 육영 정신으로 세운 사학을 두고 투쟁적 이미지가 강한 전교조 조직 편에 서서 법을 바꿔 온 나라가 흔들리다시피 분열되고 있는 모습은 세상이 100년 전으로 뒷걸음치는 듯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