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

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 한창호 지음/ 돌베개 펴냄

예전 영화 주간지 '씨네21'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칼럼이 있었다. 영화 거장들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서양화 명작과 연결시켜 설명한 내용. 서양화 사진과 영화 속 한 장면은 판에 박은 듯한 느낌을 자아내며 충분히 흥미를 이끌어냈다. '영화와 미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영화 읽기를 새로운 방법으로 하고 있어 꽤나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칼럼을 연재한 영화평론가 한창호 씨의 글은 명작 영화의 독특한 미학 뒤에 숨겨진 회화 작품을 날카롭게 간파해냈다. 이탈리아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미술과 클래식 음악, 오페라에 대해서도 마니아적 열정과 깊은 식견을 가진 한 씨의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전작 '영화, 그림 속을 걷다'와 같이 이 책도 '씨네21'에 연재됐던 '영화와 미술' 칼럼 중에서 35편을 묶어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로 명성만 알려진 왠지 낯선 유럽의 거장들 작품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 솜씨가 여전하다.

전작은 인간의 심리와 정서, 사랑과 죽음을 중심으로 한 7가지 주제를 통해 영화의 상상력이 미술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그려냈다. 이에 반해 '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는 7개의 중요한 미술사조를 중심으로 좀더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으로 영화와 미술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책의 짜임은 서양미술사의 연대기를 그대로 따랐다. '르네상스 미술' '플랑드르 미술' '바로크 미술'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야수파·입체파' '아방가르드' '팝아트' 등 7개의 주요한 미술사조로 각 장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미술 양식으로부터 영향받은 영화들을 소개해 자연스럽게 미술사조의 미학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각 장마다 붙은 작은 제목은 미술사조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며 문학작품에서 땄다. 르네상스 미술은 톨스토이의 '부활', 팝아트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하는 식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미술을 전공했거나 미술을 지극히 사랑했던 감독들이 서양미술사의 대표적인 주제, 모티프, 미술작품의 이미지를 자신의 영화 속에 어떻게 인용했는지, 미술의 이미지로 등장인물의 감정과 영화의 줄거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했는지를 잘 담아내고 있다.

책에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페데리코 펠리니, 루이스 브뉘엘, 장 뤼크 고다르, 그리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 '심미주의자' 감독들이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스크린 위에 아름다움의 절정을 뿜어내고 있'는 작품들을 많이 설명하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권위자 로베르토 롱기의 애제자이기도 한 파졸리니는 '아카토네' '마태복음'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마사치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을 풍부하게 인용했다.

캐리커처 화가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펠리니는 '8 1/2'에서 플랑드르 화가들의 17세기 풍속화를 좋아했던 자신의 취향을 반영했다. 주인공 귀도의 상상 속에 나오는 하렘을 플랑드르 실내화의 어느 집 안처럼 꾸몄다. 귀도의 아내 루이자는 베르메르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가사 노동에 시달리던 플랑드르의 여자들처럼 분장시켰다.

미술학교 출신인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은 '회화 속에 영화적 이미지를 끌어들인 것'으로 해석될 정도로 회화에 더 무게중심을 둔 작품을 만들었다.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은 바로크 시대의 기인이자 거장인 카라바조의 화풍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 고딕 미학의 후계자인 팀 버튼 감독은 '슬리피 할로우'에서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에서 주조를 이루는 이미지를 빌려다 썼다.

뮤지컬 영화사 혹은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파리의 미국인'의 17분 짜리 라스트신은 빈센트 미넬리 감독이 자신이 좋아하는 프랑스 화가 중 하나인 툴루즈 로트레크의 '아킬레스 바의 초콜릿 댄싱' 속으로 주인공 제리가 들어가 춤추는 장면을 담고 있다. 누벨 바그 세대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은 '몽상가들'에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얼굴에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끼워넣어 '다다'적인 유희를 전해주고 있다.

팝아트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에는 처음부터 팝아티스트들이 보여준 노란색과 붉은 색 등 원색의 이미지가 화면을 압도하고, 곳곳에 팝아트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지은이는 '아름다움을 보는 데도 약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며 '이 글들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나아가서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그 말대로 책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고전의 중요성'을 재확인시켜주고, 이와 함께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눈'을 더해준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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