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도서관의 문학청년 할아버지

하필이면 유난히 춥고 바람이 불던 12월 초 새벽, 나는 도서관 앞에서 언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도서관 현관 앞에는 가방이나 짐 보따리의 행렬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시립 도서관에서는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작은 사물함을 월 초마다 선착순으로 나누어 주었다.

매일 들고 다니기 번거로운 사물들을 몇 달 동안 넣고 다닐 수 있는 혜택은 늘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나 문구류, 일회용 커피나 칫솔 따위를 넣을 수 있는 사물함은 자그만 보물 창고였다. 바로 그 사물함을 얻기 위하여 줄을 서는 것이다.

새벽부터 줄을 서며 키를 받으려는 열성분자들은 대체로 젊은 학생들이 많았지만, 내 나이 또래의 아줌마들도

몇 눈에 띄었다. 가만히 보니, 식당이나 로비에서 자주 마주쳤던 백발의 문청 할아버지도 두꺼운 파커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이상을 영하의 날씨에 떨면서 기다리다, 드디어 사물함 키를 받았다. 할아버지도 받았고 나도 받았다. 추위가 싹 가시는 순간이었다. 작은 키 하나씩 들고 그렇게도 좋아하는 표정이라니.

올 초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한 이후 변한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도서관 출근이다. 짧지 않은 기간 습작생으로 글을 쓸 땐 일상과 도서관의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일상의 삶은 가시적이고, 늘 움직이며 소모적이다. 반면 글을 쓰는 작업은 내면의 어떤 것과 끊임없이 승부하며 끈질기게 책상 앞에 앉아있음으로 해서 얻어진다.

내속에 있는 것을 문장화하여 손끝으로 끄집어내기까지의 작업은 일상과 더불어 진행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등단하자마자 나는 가족에게 도서관 출근을 선언했다. 놀더라도 책 옆에서 놀고, 낮잠을 자더라도 책 옆에서 자겠다는 결심이었다.

출근하는 승객들로 이미 만원인 마을버스에 가까스로 올라타, 운전기사 할아버지가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로 이것저것 새로운 정보를 얻어듣고, 사람들 틈을 겨우 비집고 도서관 앞에 내리면 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일 년이 흐르고 보니 자연스레 도서관 마니아가 되었다.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고 토익 공부를 하고 공인중개사 시험문제를 푸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온종일 글 쓰고 책만 읽을까? 책 앞에서 졸기도 하고, 아예 책 위에 팔베개를 하고 설핏 낮잠을 자기도 하고, 공연히 젊은이 옆에 앉아 그네들의 언어를 염탐하기도 하고, 도서관 뒤뜰을 하릴없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도서관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은 역시 점심시간이다. 뜨거운 물 한잔 옆에 놓고 차가운 도시락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식당이나 휴게실이나 로비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안면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말은 나누지 않아도 몇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그리고 그 사람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문청 할아버지도 그렇게 해서 알게 된 분이다.

얼마 전 할아버지 옆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신춘문예 당선집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그 후 나는 그 할아버지를 만년 문청이라고 불렀다. 물론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신춘문예 당선집을 들고 다니는 문청 할아버지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문청 할아버지를 만남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언제까지 도서관 출근을 할까? 얼마쯤 세월이 흐른 후, 도서관에 열정적으로 다녔던 한 때를 그리워할 지도 모르겠다. 혹시 아나, 나도 저 백발의 문청 할아버지처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도 여전히 도서관에 드나들면서 젊은이들 틈에 끼어 새벽 줄을 서고, 사물함 키를 받고 온종일 즐거워 할지.

무엇인가 목표를 두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내년 신춘문예에는 '노익장 과시 당선'이라는 기사를 보았으면 좋겠다. 만년 문청 할아버지, 힘내시고 파이팅!

이숙경(소설가·2006년도 매일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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