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 한잔의 단상]미안합니다

쑥덕거림이 술렁거림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욕설이 난무하는 아비규환 생지옥이 됩니다. "니가 봤나?" "안 봐도 뻔하지!" 삿대질이 상대의 콧구멍을 후벼 팔 정도로 예리해집니다. 맞댄 배가 부딪치고,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몇 번 계속됩니다. 급기야 폭력 사건으로 발전합니다. "니 지금 내 쳤나?" "니가 먼저 쳤잖아!"

조용한 마을에 일이 터집니다. 1주택 1인주거가 대부분인 시골마을, 다들 집 비운 대낮에 도난사건이 발생합니다. 자식들이 주고 간 용돈이 봉투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어려운 살림 쪼개 부모에게 드린 정성이 애달프다는 피해자,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안타까워합니다. 세상 변화와 무관한 청정지역, 새마을 운동이 돌담을 시멘트벽돌의 높은 담장으로 바꾸긴 했지만 사리나무 울타리의 이웃정이 가득한 곳입니다. 농촌지역 구석구석에 방범카메라가 설치되었지만 대문 닫힌 집조차 없는 마을입니다.

'평소품행이 방정하고….'가 필수적이었던 추억의 우등상, 개근상 문구가 새삼스럽습니다. 조금이라도 품행이 방정맞은 사람들은 피의자가 됩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 세 사람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든다 했습니다. 평소에는 있던 물건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람들이 기억을 끌어 모아 대도(大盜)를 만들어냅니다.

오래 묵은 집단의 무서움은 배타성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경계와 영역침범에 대한 강한 방어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 티격태격하다가도 이질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먹이 본 승냥이마냥 똘똘 뭉칩니다. 수사는 알리바이가 아니라 누가 더 남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도둑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도둑을 만듭니다.

이방인, 가장 이질성이 큰 남이 도둑이 됩니다. 한류드라마에 사기 당한 희생자, 외국인 며느리입니다. 그리던 유토피아에 당도했지만 근사한 음악과 조명, 애틋한 감정부스러기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소녀입니다. 현실인식과 적응에 안간힘을 쏟은 그녀, 이제 겨우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우리 애 엄마를 어찌 안다고?" 며느리를 감싸는 시어머니와 이방인으로 치부하는 피해자의 설전장, 지켜보는 며느리는 마냥 신기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자칫했으면 한국아이에게 외국인어머니를 만들어줄 뻔 했습니다. 이해와 오해, 그 깊은 골에서 울고 있는 많은 며느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합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