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불황 터널 뛰어 넘자" 마라톤 마니아들의 '달리기 예찬'

▲ 마라톤 풀코스 103번, 울트라마라톤 12번을 완주한 전석광 교사.
▲ 마라톤 풀코스 103번, 울트라마라톤 12번을 완주한 전석광 교사.
▲ 2년째 전국의 5km, 10km대회를 휩쓸고 있는 양선자씨.
▲ 2년째 전국의 5km, 10km대회를 휩쓸고 있는 양선자씨.

"요즘처럼 어려울때 달리기 만큼 좋은 운동이 있나요. 돈도 들지 않고 건강과 정신력까지 챙길 수 있는데…."

숨이 턱까지 헉헉 차올라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귓전에 스치는 바람을 가르며 가뿐한 발걸음으로 내달렸던 처음의 마음은 2㎞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가슴속에는 '왜 누가 시키지도 않은 마라톤을 하고 있을까?'라는 자책섞인 푸념만 떠돈다.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족들에게 나는 좋은 아빠, 엄마였나' '내 어릴적 꿈은 어디로 사라졌던가', '내가 걸어온 길은 무엇이었으며,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은 어떤 것인가' 수만가지의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말 이제는 극한이다 싶은 지점.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몇 발자국만 더 뛰고 주저앉을까, 어디쯤에서 포기하면 좋을까"를 계산하지만 발은 관성이 붙어 계속 앞으로 내딛기만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고통이 환희로 바뀌면서 서서히 내 안을 채워갈 즈음, 마침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결승선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래서 사람들은 '마라톤은 인생이다'고 말들 하나보다.

◆나에게 마라톤은 무엇인가?

전석광(55·경신고) 교사는 지금껏 42.195㎞의 마라톤 풀코스를 103번 뛰었고, 12번의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했다. 울트라마라톤은 일반 마라톤 풀코스보다 먼 거리를 달리는 경기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 그가 뛰었던 울트라마라톤 중 10번은 100㎞가 넘는 장거리 경기였다. 전 교사는 "긴긴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마라톤 역시 자신의 한계와 싸워 이기며 오르막 내리막을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껏 참가했던 수많은 경기 중 가장 힘들었던 경험으로 올 3월의 '가톨릭성지울트라마라톤대회'를 꼽았다. "밤새 부슬부슬 비가 내렸습니다. 체력은 바닥났고, 체온마저 떨어져 60㎞를 넘어서면서 '어디서 포기를 해야하나'는 고민을 수십번 반복하면서 암흑 속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해냈고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가슴벅찬 감동을 맛봤다. 전 교사는 "내가 앞서가든 뒤처지든 어느 시간대에 있든 묵묵히 내 몫을 다하는 것이 마라톤이고,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2년째 전국의 5㎞, 10㎞경기를 휩쓸고 있는 양선자(43·여·자영업)씨는 '마라톤은 환희'라고 정의했다. 올해만 벌써 16번의 대회에서 1~3위를 차지했다. "여느 주부와 마찬가지로 자식과 남편에만 목을 매는 아줌마였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루한 일상이었죠. 하지만 마라톤을 시작하고 모든 일에 활력이 생기면서 인생이 바꿔었습니다." 양씨는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는 말을 체감했다고 했다. "땀을 흘려 내 안에 쌓여있던 불만, 시기, 질투 같은 나쁜 감정들을 다 흘려보내고 나면 내가 새롭게 태어난 듯 상쾌해집니다. 이렇게 변화할 수 있다는 자체가 환희였죠."

◆새롭게 시작한 인생

전 교사는 마라톤을 통해 학생들과의 관계도 더 좋아졌다고 털어놨다. "함께 땀을 흘리며 뒹구는 것 만큼 쉽게 마음을 열어주는 일이 없잖아요. 문제아들도 몇바퀴 운동장을 함께 뛰고 주저앉으면 가슴 속에 있는 말들이 술술 흘러나옵니다. 한바탕 땀을 흘린 뒤 학생들과 함께 목욕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양씨에게 달리기는 가족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연결고리가 됐다고 했다. 남편과 함께 매일 아침 동네 산을 오르고, 밤이면 함께 운동장을 뛰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양씨는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두 딸도 이제는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한다"며 "딸들이 경기가 있는 날이면 꼭 전화를 걸어와 '오늘은 몇 등 했어', '다치진 않았어'라며 관심을 보여줘 고맙다"고 했다.

전 교사와 양씨 모두 마라톤을 시작한 계기는 건강 때문이었다. 마라톤을 시작하고 나서 10㎏이상 살이 빠졌다는 것도 공통점.

전 교사가 달리기 시작한 것은 2001년 1월 모 방송사에서 독일 외무장관 피셔의 마라톤 인생을 방영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후부터였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이탈리아의 어느 한적한 시골길 언덕을 오르내리며 자신만의 시공간을 달리는 피셔의 모습은 일종의 경건함마저 느끼게 했다. 하지만 마라톤은 쉽지 않은 운동이었다. "첫날 초교 운동장 세바퀴를 돌고나서는 몸살로 사흘을 누워 앓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 앞에 부끄러운 교사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저를 다시 뛰게 했습니다." 그렇게 운동장에서 1년 반을 뛰고 나서야 그는 2002년 9월 충주마라톤대회에서 처음으로 42.195㎞를 완주할 수 있었다.

학생시절 핸드볼 선수로 활약했던 양씨는 결혼 후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허리와 발목 통증이 생겨 마라톤을 시작했다. 양씨는 "달리기는 모든 운동의 기초가 되는데다 운동화만 있으면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라며 "요즘 같은 불황에는 건강이 재산인 만큼 마라톤을 통해 자신을 추스리면 좋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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