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의 공간]헌책방

세월에도 냄새가 있다면 이런 냄새이지 않을까! 오래된 책이 쌓인 헌책방 모퉁이를 돌다 보면, 어느덧 시간을 거꾸로 달려온 듯한 착각이 든다. 한 때 귀한 대접을 받던 책들이 쌓여있는 이곳에서 잘 뒤적이다 보면 뜻하지 않은 보물을 발견할 것만 같다.

대구의 헌책방들은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풍토에다 경기불황이 겹쳐지면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헌책방은 지금도 흥미로운 보물창고. '손님은 1세부터 100세까지, 책은 400년 전 고서부터 최신작까지'라는게 30여년째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코스모스서점 사장의 말이다.

전국적 규모를 자랑하는 코스모스서점 배숙희 팀장은 최근 책방을 찾은 80대 할아버지가 기억에 남는다. 1960년대 나온 삼국지 초판본을 구입하러 온 분이었다.

"당시 3권짜리 삼국지 한질에 600환을 했다고 해요. 그때 소 한 마리 300~400환이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가격이었죠. 그 책을 너무나 읽고 싶었던 그분은 부잣집 친구에게 빌려달라고 했었지만 거절당했대요. 그 후 60년간 원망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죠."

80대 노인은 삼국지 한질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배 팀장은 "책을 통해 60년 한을 푸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면서 "아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 책들 사이에서 뜻하지 않은 연애편지가 발견되기도 하고 수십년 전, 어느 소녀가 끼워뒀을 법한 낙엽 책갈피도 간간히 나온다. 헌책방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재미다.

남편과 함께 헌책방을 찾은 방헌숙(38·대구 북구 산격동)씨는 "새책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아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면서 "수년간 입소문을 탄 책을 싼 가격에 볼 수 있어서 헌책방을 주로 이용한다"고 말했다.

한때 대구에 150개 이상의 헌책방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10여곳에 불과하다.

헌책방의 전성기는 1989년 이전. 그 후론 책 출간이 봇물을 이루면서 책에 대한 희소성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구의 헌책방 거리는 모두 세 군데. 대구시청 주변, 대구역네거리 지하도, 남문시장 부근이지만 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대구에 헌책방 거리의 시초는 6·25 직후 대구시청 부근이다. 대구시청 헌책방 거리는 서울의 청계천, 부산의 보수동, 광주 계림동보다 10년 앞서 형성됐다고.

책대여점을 상대로 헌책을 판매하고 있는 한 서점 관계자는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헌책방도 살아남지 못하는 분위기라, 어르신들이 아예 문을 열지 않는 날이 더 많다"면서 "우리도 업종전환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구의 살아남은 헌책방들은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만큼의 규모를 자랑한다. 남문시장 부근 코스모스서점(http://csbook.co.kr)은 80~100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1997년 인터넷 헌책방 시대를 열기도 했다. 인터넷에는 전체 수량의 5~10%밖에 데이터화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10만권이나 된다.

경북대 후문 근처의 합동서점(www.habdongbook.com)도 마찬가지. 80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 전국에서 헌책방 마니아들이 다녀가고 있는 곳이다.

책은 일반적으로 20년이 넘어야 희소성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책을 소장하다가도 보통 20년 이상 되면 개인이 폐기하기 때문에 가치가 높아진다. 1960~80년대 책은 '준고서', 1960년 이상된 책은 고서에 들어간다.

책값은 그 책의 희소성·유명도·보관상태에 따라 다르게 책정된다. 8천~1만2천원선에 발간되는 최근작은 2~4천원 수준. 3분의 1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은 보통 2,3천원이면 구입할 수 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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